#비 온 뒤 대학로, 종로 출근길
물은 비에 젖지 않는다.
-「물은 비에 젖지 않는다」중, 김아타
천천히 준비하고 출근길을 나선다.
밤에 시작한 비는 요란하지 않았고, 마침 출근 시간에 그쳤다.
대문을 열기 전 심호흡을 몇 번 크게 한다.
시원한 아침 공기가 몸 깊숙이 들어온다.
입 속에서 반복하던 누군가의 문장을 살짝 손본다.
"물은 비에 젖지 않지만, 그 순간은 기억한다."라고.
비가 그친 세상은, 하나의 새로운 버전이다.
늘 보던 풍경, 늘 걷던 골목이 하나의 겹을 벗은 듯 보인다.
이 풍경은, 비가 현재 진형형으로 내릴 때와도 다르다.
비가 내릴 때 세상은 비에게 시선의 앞자리를 내어준다.
잠시 내리고 부서지고 쓸려가는 빗방울을 바라보는 건 쓸쓸한 즐거움이다.
비가 막 멈췄을 때 표면을 가진 모든 것은 달라 보인다.
갓 만들어진 듯한 기분 좋은 생경함이 가득하다.
하지만, 이것이 순간이란 걸 안다.
밤 사이 잊고 있던 소리가 골목을 메우고,
볕이 하나의 풍경에서 다른 풍경으로 옮겨가기 시작하면,
말갛던 세상에 또 하루 치의 익숙함이 더해질 것이다.
그런 이유로, 비가 그친 아침의 순간을 호젓하게 즐길 수 있다는 건 행운이다.
잔잔한 일상의 소음이 되돌아오기 전의 아침 골목을 천천히 밟아간다.
내가 집에서 키우는 화분은 비를 맞아본 적이 없다.
비가 오는 어느 주말마다, 화분을 한 번 내놔야지 하면서도 그런 적은 없다.
빗방울이 튀면서 지저분해질까 봐 그런 것도 있지만,
어쩌면 집에서만 있던 것들이 비와 못 어울릴까 봐 걱정한 탓도 있다.
누군가가 내놓은 화분에 빗물이 가득이다.
운이 좋은 식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공의 도랑, 풀은 열심히 자란다.
내린 비는 당장의 흔적을 남기지 않았지만,
녹색의 풍경을 타고 골고루 퍼져나갈 것이다.
바람이 불자, 나무에 남아있던 빗방울이 머리 위로 떨어진다.
잠시 후에 머리를 털어보지만 흔적은 찾을 수가 없다.
스스로가 식상하다고 느껴질 때가 점점 많아진다.
굳이 나이를 끌어들이지 않아도 불쑥불쑥 그런 생각이 떠올라 버린다.
그럴 때면 수많은 시절을 통과해 온 곳이 겨우 여기였나 싶어 속상해진다.
어쩌면 그런 불만은, 하나의 착각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가 만들어온 세상에서 성에 차지 않는 것들을 한 번에 몰아내고,
나 자신이 흡족해할 풍경을 새로 만들 수 있다는 착각.
하지만 안다.
재앙 같은 홍수가 쓸어가 버리지 않는 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비가 내려 모든 것들이 새로워 보이는 이런 아침 같이, 작은 순간으로도 꽤 큰 위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그렇게 낯익은 풍경의 힘으로, 어제라는 하루에서 오늘이라는 하루로 폴짝 건너올 수 있다는 것을.
파출소 앞 도로, 사고가 난 빨간 차를 지나친다.
다행히 운전석이나 보조석은 멀쩡하다.
보닛에 있는 빗방울은 오전에 지나기 전에,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마를 것이다.
먼지가 씻겨간 골목이 서서히 고요를 벗는다.
커피집에 사람이 하나둘 드나들고, 그 사람들이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급하게 확인해지 않아도 될 것들을 굳이 바로바로 확인하는 사이에.
짐을 갓 실은 1톤 트럭이 지나가고, 짐칸을 개조한 오토바이가 지나가고,
구석을 놓치지 않는 거리 청소차가 지나가는 사이에.
놓아야 할 것들이 한가득이다.
놓친 것들을 채운 자리에.
색은 선명하고, 균열은 더 선명하다.
트럭의 주인이 저 문을 여닫고 트럭이 거리를 달릴 즈음에
운전석 손잡이에 매달린 마지막 빗방울들은 자취를 감출 것이다.
그것을 아는 듯한 지금의 방울방울들은 왠지 모르게 신나 보인다.
오래된 골목, 조그만 수레가 지나가는 걸 길게 바라본다.
수레에 실린 무엇처럼, 그 수레를 밀고 끄는 누군가들처럼,
비의 흔적도 어딘가에서 어딘가로 옮겨갈 것이다.
잠시 동안 풍경에 선사했던 청량함을 뒤에 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