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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May 13. 2021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방향으로

#경북 김천 청암사


산이 깊다고 했다.

비구니 사찰이라고 했다.

사찰음식으로 유명한 곳이라고 했다.


운전을 하는 이모가, 청암사에 대해 말해준 건 이게 다였다.


국도변의 낮은 풍경을 눈에 담으며,

지금 찾아가는 절과 나의 일상 사이의 거리를 계속 가늠한다.

먼 곳에서 점점 가까워지는, 어떤 선을 따라가는 느낌이라기보다는,

작은 단위의 고도(高度)를 무시하고, 한 챕터에서 다른 챕터로 건너뛰는 느낌이다.


"계절이 조금만 지나도, 금방 지치는 녹색이 되더라. 지금은 예쁜데."


차는, 연한 녹색의 봄을 가르듯이 나아간다.

이모는 이 절에 대해 한 가지 덧붙였다.

어쩐지 언젠가 가보고 싶었던 곳, 이라고.



주차장에 내려 걸어 들어간다.  


분명 산을 가르고 길을 냈을 텐데, 산과 길은 반목하지 않는다. 

산의 아래와 위는 길로 이어지고, 

길의 시작과 끝은 산을 공유한다. 


큰 그늘들이 이어진다. 



인연은 늘 자리를 내어준다.

덕분에 산패하지 않을 수 있다.


자연도 인연과 같다.

묵힌 자리를 내어준다. 빈 공간을 여린 것들이 채운다.


지나간 인연이 길을 따라 떠오르고 흘러간다. 

하나의 얼굴에서 하나의 얼굴로 생각이 옮겨간다.

몇 번의 반복이 멈출 즈음, 발자국 소리가 귀에 들어온다.  


그런 길이다.

그런 길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그런 길이다.

 


사천왕이 있는 천왕문을 지나 들어간다. 

계곡이 깊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은 나무들은 길고 굵고 자라 있다. 


글자들이 음각으로 새겨진 바위 사이에 있는 다리에서, 

사람들이 사진을 찍는다. 


무언가를 남기려는 욕구는 요란스럽지 않다. 예전에도 지금도. 



보라색 꽃송이가 가득한 아카시아 나무를 지난다. 

꽃 향은 위에서 아래로, 다시 아래에서 옆으로 퍼진다.


나무의 아래, 그러니까 깨끗하게 닦인 흙길의 가장자리에 다양한 꽃들이 심겨 있다. 

풍성한 무리를 의도했다기보다는, 각자의 영역을 고려해 심은 듯하다. 

이격(離隔)을 바라고 온 사람들이 그 풍경을 지나간다. 



다리 하나를 더 건너, 대웅전과 석탑이 있는 경내로 진입한다.

신라시대 859년에 창건됐다는 안내문을 읽는다.  



일요일 오후임에도 관광객은 적다.

모두, 수적인 열세를 긍정하듯이 조용조용히 움직인다.


작은 구름 몇 점 걸린 날이다.

하늘의 색이 중간에 걸러지지 않고 절 전체로 떨어지고 있다.

대웅전과 석탑은 크기에서건, 색의 선명도에서건,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방향으로 지어진 듯하다. 



대웅전이 보이는 그늘에서 한숨을 돌린다.


내처 밀어낼 것이 없을 풍경임에도, 닫힌 문의 유리는 녹색을 반사한다.

다시 밖으로 내어놓는 녹색은 왠지 더 짙어서,

계절을 앞서 여름에 당도한 듯이 보인다.

착시현상일 것이다. 



모니터 위에 씌운 유리판에 노부부가 비친다.

 

한 걸음 앞선 사람은, 한 걸음 뒤에 있는 이의 손을 잡고 있다.

둘의 사이는 단 한 걸음이다. 

다정하고 가까운 거리다. 

인연은 어쩌면,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는 것일지 모른다. 



경내 곳곳에 꽃나무들이 있다.

왼쪽, 오른쪽 건물 앞에 한 그루씩 있는 자목련은

초봄이 한참 지났는데도 아직 풍성한 꽃을 달고 있다. 


작은 나무들은 충실히 제 역할을 수행한다. 

꽃송이들은 빈 곳도, 다투는 곳도 없이 피어있다. 

햇볕에 눈이 부셔 바닥으로 시선을 돌리니, 그림자가 눈에 들어온다. 

하나의 꽃에는 하나의 그림자만 있다. 간명하다. 


평소, 하나를 지니고도 두어 개를 더 욕심내곤 하는, 

나 자신의 모습을 돌아본다. 


하나밖에 없는 기회가 사라질까 봐 불안하다는 이유로, 

이 시간이 흘러가버리면 끝이라는 이유로, 

나를 확인할 방법이 이거밖에 없다는 이유로, 

내가 가진 것들이 부족할지 모른다는 이유로,   

어쩌면 희미한 허상에 매달리고 싶었는지 모른다. 



마스크 쓰기를 당부하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저마다 한 번씩 마스크를 매만진다.



건너왔던 다리를 다시 건너간다.  



표지판을 따라 반대편 계단으로 오르니, 한편에서 지붕을 덮고 있다. 

기와를 벗겨낸 흙빛의 지붕은 생경한 풍경이다. 

인부들은 최소한의 소리를 내며 작업을 하고 있다. 


누군가의 축원이 담긴 기와는 곧 각자의 자리를 찾아갈 것이다. 



선방이 위치한 곳의 것들은 왠지 모르게 차분해 보인다. 

나무와 돌, 하늘의 구석까지. 

독경 소리나 풍경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울림의 꼬리가 짧은 산새 소리가 전부다. 


대문 앞에 출입을 막는 나무 안내판이 놓여있지만, 

굳이 저 표지가 없어도 쉽게 문 안으로 발을 들일 순 없을 것이다. 


풍경도, 동선도 절제돼 있다. 



올라왔던 계단과 다른 계단 쪽으로 향한다. 

나무 사이로 부도들이 보인다. 


누군가는 떠나며 빈자리를 남기고, 

누군가는 떠난 사람의 흔적으로 그곳을 채운다. 


부도 덕분에 숲의 빈 공간이 매워졌지만,

부도 덕분에 숲이 온전한 숲으로 보인다. 



하루가 사라지듯 계절은 사라진다. 

계절이 자신의 자리를 바꿀 때, 우리는 하나의 과거를 마감한다. 


우리는 그런 시간의 흐름을 핑계 삼아 많은 걸 할 수 있을 텐데,

정작 하루하루의 고민을 챙기느라 놓치는 게 많다. 


무엇을 만들어낼 것인가, 

무엇을 남길 것인가,

무엇을 편애할 것인가. 


왔던 숲길로 돌아내려가면, 이런 질문들이 다시 슬그머니 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괜찮다. 


깊은 숲이 자신의 빈 곳을 채우는 듯 남겨두듯이, 

오래된 절이 자신의 색을 버리는 듯 아끼듯이, 


우리는 질문에 꼭 맞는 답을 채울 수 없고, 

아무런 답을 가지지 못한 질문을 할 수 없다는 걸 아니까. 


그렇게 요란하지 않게, 큰 그늘 듬성듬성한 길을 따라가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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