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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Jul 30. 2021

어떤 류의 조급함

#파키스탄 훈자 계곡

"전에는 뭐 하셨는데요?"

"영국에 있는 영국인이었죠."

"어떤 사람이었냐고요."

"이제 그 사람한테는 관심 없습니다."


-소설 「내가 널 파리에서 사랑했을 때」中, 제프 다이어





아이들이 뛰어온다.

걸음마다 고운 모래가 튀어 오른다.

소리를 내지 않으며 흐르는 수로에는 포플러 나무의 그림자가 드리워져있다.


그곳에 머물던 일주일 가량 늘 반복되던 일이었다.

아이들 딱히 목적이 있어서 달려오는 건 아니었다.

이방인인 나와 한 마디도 통하지 않을 것임을 그들도 알고 있었을 테니까.

우리가 할 거라고는 서로 반갑게 웃는 게 다였다.

그리고 내가 사진기를 들고 동의를 구하면 한번 더 웃었다.

 

단지 그것뿐임에도, 아이들은 멀리서부터 환대해주었다.

 


오래전 기억은, 오래됐다는 이유로 선명하다.


훈자 계곡으로 간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

이유라고 부르기 애매한 단편적인 사실 하나가 다였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라는 애니메이션의 배경이 된 곳.


졸업을 하고 떠난 후 몇 달째 여행 중이었기에,

파키스탄에서 여정을 이어갈 곳이 필요하기도 했기에, 고민 없이 이곳으로 갔다.

이전 도시에서 이곳으로 갈 때 23시간 동안 버스를 탔다.

 

원래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했다.

도착 전날 저녁 어느 휴게소에 기약 없이 버스가 정차했을 때,

버스에 같이 탔던 젊은 친구가 수십 대의 버스와 트럭이 발이 묶인 이유가

고갯길에 나타난 '강도들' 때문이라고 설명해줬다.

누군가가 습격을 당했고, 누군가가 해결하러 갔다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말하는 그도 대수롭지 않았고, 듣는 나도 그랬다.

열 시간 넘게 탔던 버스에서 길게 내릴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만 했다.



여하튼, 떠난 지 23시간을 갓 넘겨서야 버스는 훈자 계곡에 도착했다.

터미널에 있는 매대에서 '메카 콜라'를 한 병 사서 마시면서 새삼 자각했다.

내가 애니메이션을 별로 즐기지 않았고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역시 본 적이 없다는 걸,

내가 이곳으로 오게끔 한 이미지는 그 애니메이션의 포스터가 다였다는 걸.


그리고 훈자는, 그런 대수롭지 않은 이유로 이곳에 찾아온 게 다행이라고 생각할 만큼,

아름다운 곳이었다.  



하지만, 난 담백하게 그곳을 즐기지 못했다.

하늘과 계곡이 한눈에 보이는 곳에 앉아서도 내가 수첩에 적었던 건,

섣부른 반성과 조급한 계획 들이었다.


졸업 직전에 응시했던 취직 시험에 다 떨어진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한국에 돌아간 후 어떤 회사에 시험을 칠지

그것을 위해선 어떤 계획을 짜야할지 등등.


지금 돌아보면 쓸데없는 걱정이, 그때는 그렇게 커 보였다.


 

근래 몇 달, 숫자에서 오는 조급함으로 정신이 없었다.


나이, 잔고, 실적......

고민을 한다고 나아지는 문제는 그중에 하나도 없었지만,

고민이라도 하지 않으면 그나마 쥐고 있는 것들이 손에서 빠져나갈 것 같은 위기감이 느껴졌다.

서로를 분간할 수 없는 무료함과 무기력이 이어졌고,

질문과 답이 지루하게 서로의 꼬리를 물었다.


극적인 엔딩이라도 있었으면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결국 시간이 답이었다. 일상의 습관적 시간이 고민의 시간을 대체했다.

어렵지도 쉽지도 않게 한 시기가 흐른 느낌이다.



오래전 수첩 속의 조급함을 발견했다가, 그곳의 사진을 하나하나 들여다본다.


사진 찍기에도 의욕이 떨어진 시기여서 사진은 많지 않다.

그런데 사진을 넘기다 보니, 내가 그 시기를 '조급함'으로 정리해버린 걸 반대한다는 듯이,

반가운 기억들이 불쑥불쑥 살아난다.


수로 공사장에서 만난 아저씨들은 딱딱한 빵을 나눠주었고,

지나가던 트럭의 운전사는 굳이 차를 멈추고 손을 흔들어주었다.

말린 살구가 듬뿍 나오던 숙소의 아침 식사와

술이라곤 찾아볼 수 없던 점방의 풍경도 기억났다.


그런 장면들로 이루어진 기억을 한참 즐기다 보니,

그 시절 '조급한 버전으로의 나'에겐 관심이 없어졌다.



결국 어떤 시기도 하나의 종류는 아닐 것이다.  


어떤 류(類)로 규정했다 해도, 빈 공간은 남아있을 것이다.

다만 한 종류의 감정이 조금 더 많을 뿐이다.


앞으로도 어떻게든 규정하고 치워버리고 싶은 시기가 찾아오고,

그때마다 처음인 것처럼 당황할 테지만,

부풀려진 것들에 너무 관심을 두진 않을 것이다.

그 뒤에 어수선하지만 다양한 것들이 숨어있다는 걸 아니까,

그리고 그것들로 인해 명쾌한 답이 없어도 일상은 이어질 수 있다는 걸 아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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