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너무 다른 역할 Aug 27. 2021

제주에 도착할 때마다 지난 제주를 떠올린다

#여름휴가끝

하지만 우리는 금요일 밤이 오기 전까진 거의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었다. 푹푹 찌는 날씨 탓에 낮에는 집안에만 틀어박혀 호러영화를 보고 아이스티를 들이부었으며, 밤이면 태너가 모는 트럭을 타고 다니면서 돌아오는 금요일에 할 일을 계획했다.


우리가 시간을 인생을 허비하고 있다고 부모님들은 말했는데 그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소설 '외출' 中, 앤드류 포터 소설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작정할 일은 없었다.


가벼운 휴가였고, 조카들과 함께 가는 터라 숙소와 동선도 정해져 있는 가족여행이었다.

누군가를 모로 떠올릴 일도, 어느 흔적을 일부러 찾아갈 일도 없었다.

이번의 제주는 이번의 제주일 뿐이었달까.



그런데도, 제주에 도착한 순간에 지난 제주들이 떠올랐다.

장소도, 사람도, 바다 색깔도 무작위로.


생각나는 장면 속 내 모습 역시 무작위였다.


어느 제주에서 나는 내처 걷기만 했고, 어느 때에는 내내 운전만 했다.

꽤 무난한 코스를 짜 와서 따라간 적도 있었고,

출도착 비행기 외엔 아무것도 정하지 않고 다닌 적도 있었다.


뭐를 해도 될 것만 같은 곳이었다, 왠지 제주는 늘.



바쁜 와중에 짬을 내 온 여행이었건,

한가한 와중에 갈 곳이 없어서 택한 여행이었건,

제주에서의 며칠은 늘 별 볼 일 없었다.


몇 가지 목적-이를 테면, 이번엔 한라산을 걸을 거야 혹은 서핑만 할 거야, 같은-이 있었지만,

그런 목표 역시 제주에 오는 순간 말랑말랑해지기 일쑤였다.

오늘 못 하면 내일 하지, 같은 말을 내뱉을 것 같은 헐렁한 자세가 왠지 제주엔 어울렸다.

사이사이가 길게 빈, 몇 군데만 표시된 조악한 지도 속에 있는 듯이 다니면 됐다.


출장 차 왔던 때에도 그랬다.

미팅과 일을 하면서도 걸음은 제주라는 이유로 여유로웠다.

필요가 있는 일들도 최소한의 필요 외에는 불필요해 보였다.

그리고, 그렇게 해도 문제가 생긴 적은 없었다.



재밌는 건 제주에 온 순간부터 뒤에 두고 온 일상도,

제주에서의 시간만큼 별 볼 일 없어진다는 점이었다.


비행기에 타기 전까지도 머리를 떠나지 않던 것들이 제주에 도착하자마자 급격히 사소해졌고,

드문드문 걸려오는 전화나 문자도 처리하는 시간을 길게 두곤 했다.

역시나, 그렇게 해도 문제가 된 적은 없었다.

 


나의 '지난 제주'에는, 그런 허술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조바심 내거나, 애쓰지 않아도,

뭘 굳이 보거나 어디에 굳이 가지 않아도,

보란 듯이 알차게 시간을 보내지 않아도,

삼시세끼 맛집을 찾아가지 않아도,

폭우가 쏟아지거나 내내 흐려도,


제주에서의 시간은 허비된 적이 없었다.

그 단순한 기억이 늘 제주의 첫걸음에 떠올랐다.



문득, 그런 욕심을 반대로 부려볼까도 생각해본다.

제주를 떠날 때마다 지난 제주의 마지막 장면을 갈무리하거나,

서울에 도착할 때마다 지난 서울을 떠올려볼까 하는.


하지만 이내 그만둔다. 영 느낌이 살지 않는다.


그런 건 제주만의 특권으로 남겨 놓는 게 좋다.

그래야 또 어느 날 그 핑계로 제주행 비행기를 예약할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허술한 모습으로 도착했을 때 별 볼 일 없던 지난 제주들로부터 위로받을 수 있을 테니까.


여튼, 이렇게 여름 휴가는 끝.




매거진의 이전글 어떤 류의 조급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