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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다른 역할
Oct 20. 2021
게으른 산책자의 정원
#창덕궁 후원
구름은 흔하고 바람은 귀한 날이다.
궁은 북적이지 않고 다행히 내 안의 심사도 멀쩡하다.
창덕궁 입구로 들어가, 있을 리 만무한 궁의 일들을 상상하며 후원의 입구로 향한다.
14년을 이 동네에 살면서 처음 후원에 가는 이유는 단순하다.
느지감치 매표소에 가면 현장 예매 표는 늘 매진이었고,
미리 인터넷으로 예매하기엔 내가 계획적으로 산책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며칠 전 불현듯 후원을 가보고 이사를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또 다행히 오전 10시 예매 시작시간을 맞춰 들어간 사이트에서 오후 3시 입장권 1장이 남아있었다.
10여분 쯤 일찍 도착해 입구의 검표원에게 표를 내밀며 기다려야 하느냐고 묻자,
지금 들어가도 괜찮다는 넉넉한 답이 돌아온다.
구름만큼 여유도 흔한 날이다.
입구를 지나 널찍한 길을 따라 올라간다.
멈춤과 걸음이 서로를 탐하지 않듯,
담과 나무는 반목하지 않는다.
더 위로 올라가자, 거리낌 없이 자란 나무들이 하늘을 가린다.
걸을수록 느려지는 길이다.
부용지_창덕궁 후원
휘어지는 길의 끝에 첫 번째 연못이 나온다.
여름의 후, 단풍의 전인 시기여서 색은 화려하지 않다.
유모차에서 나와 걸어 다니는 남자아이의 뒤를 아빠가 느리게 쫓는다
잠시 뒤 화장실에서 나온 엄마와 여자아이에게 남자아이가 뛰어간다.
왠지 누구 하나 넘어져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풍경이다.
물의 안은 굳이 들여다보지 않고, 물에 비친 것들을 즐긴다.
이곳의 고요함
은
묵직해 보인다.
즐기라고 만들었다기보다는 쉬라고 만든 것처럼 느껴지는 곳이다.
애련지_창덕궁 후원
세월은 신뢰할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땅을 파고 물을 가두었을 것이다.
그 테두리 안
에 가둔
시간을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스스로도 기대지 못하는 자신의 심사 따위는 잊을 수 있
을 거라
믿으며.
하지만 무엇도 담아낼 듯한 연못은, 무엇도 담지 않는다.
밟아도 흩어지지 않을 것 같던 물은 천천히 흘러내리고,
시간처럼 차곡차곡 쌓일 듯하던 풍경은 작은 파문에도 소리 없이 이지러진다.
그런 이유로, 연못은 신뢰할 수 없다.
덕분에 연못에 다다르고 스치듯 돌아나가는 걸음은 가벼울 수 있다.
연경당_창덕궁 후원
오래전에 이곳에 머물렀던 이들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건물은 잘 관리된다. 눈에 닿는 곳 어디도 거슬리지 않도록.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쇠락을 떠올린다.
그것은 잔류한 시대의 모든 풍경이 가진 어쩔 수 없는 낙인이다.
특별히 아둔하지도 탁월하지도 않았던 시대였지만,
지나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공간의 밀도는 낮아진다.
쇠락을 허락하듯, 색과 선들도 억지를 부리지 않는다.
나처럼 걸음이 게으른 산책자에겐 더없이 좋은 일이다.
이곳의 고양이들은 다가오지도 도망가지도 않는다.
아마, '이곳의'를 삭제해도 비슷하겠지만.
고양이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같이 바라본다.
굳이 대결을 하는 건 아니었는데, 내가 지는 느낌이다.
고양이들은 오래 바라보고 오래 가만히 있는다.
관람지, 존덕정_창덕궁 후원
쌓일 것
이
쌓이고
,
겹칠 것
이
겹친다.
덕분에 하나의 풍경 안의 것들은,
풍경을 이룬다는 사실을 신경 쓰지 않은 채 제자리에서 안온할 수 있고,
이곳의 한 복판에서 시선을 던지는 우리는,
쌓이고 겹친 것들을 하나씩 뜯어내 초라하게 만들지 않을 수 있다.
어쩌면, 하나의 시절엔 한 장의 풍경만이 필요할지 모른다.
옥류천 가는 길_창덕궁 후원
다시 울창한 숲길로 들어선다.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마스크를 내리고 심호흡을 한다.
요즘 조급했다.
뭔가를 이룸으로써, 스스로를 증명해야 한다는 생각.
이제껏 이룬 것들이 하찮아 보이고,
지금껏 가지지 못한 것들
을
아쉬워하는 그런 상태.
나이가 들수록 쉽게 자유로워질 줄 알았는데, 쉽지 않다.
살아가는 내내 이럴 것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짧게라도 길을 걸으면,
조급함의 도돌이표 정도는 삭제할 수 있지 않을까.
옥류천_창덕궁 후원
수량(水量)이 단출한 곳이다.
대신 물의 길을 이리저리 내어 놓았다.
정자는 물이 꺾이는 곳마다 있다.
댓돌에 가방과 카메라를 놓고 다리 쉼을 한다.
내내 서 있던 관리인 한 명이 부부 관광객과 얘기를 나눈다.
아내가 보온병 뚜껑에 뭔가를 따라 건네자 얘기는 더 부드러워진다.
옥류천을 돌아 나오는 길,
오는 길에 보지 못한 나무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것도 연달아.
이상하다 생각해서, 고개를 돌려보니 이번엔 아까 봤던 나무들이 연달아 보인다.
올 때 천천히 걸으며 풍경을 여유 있게 담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내가 보는 방향이 한정돼 있었구나 싶다.
의식적으로 시선의 방향을 넓힐까 하다가 이내 그만둔다.
억지를 부리면 보던 것들도 제대로 못 볼 테니까.
한 번 갈 때 놓치는 게 있다면 그게 아쉽다면 지금처럼 한 번 더 지나가면 되니까.
숲의 한가운데서 기분 좋게 심호흡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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