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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Apr 29. 2022

도구로서의 시절

#포항 내연산

집의 동쪽 밖 계곡을 흐르는 자계천 너머에서 그토록 아름답게 보였던 건축이건만, 놀랍게도 이 정자는 집안에서는 마당을 형성하기 위한 벽체의 일부로서만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 집의 모든 건물은 그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철저히 마당을 형성하기 위한 한낱 도구였으며, 각기 다른 마당은 각기 독립된 세계였다.


-'홀로 됨을 즐기는 고독의 집, 독락당' 中, 승효상 에세이집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





잘 닦인 바위에 반사되는 빛에 눈이 부셨다.

그럼에도 시선을 거두기 아까운 풍경이었다.

길은 이어지기를 반복해서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주차장 입구에서 5분 정도 걸어 올라온 후 내내 그랬다.



"요새 녹색이 얼마나 이쁜데. 놀러 가."


금요일 밤 통화에서, 주말에 포항에 친구를 보러 갈까 말까 망설이는 나에게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토요일 아침 일찍 차를 몰았다. 명분은 단순했다.

친구에게 술을 얻어먹는 것. 그리고 녹색을 구경하는 것.


긴 여정 끝에 도착한 포항에서 저녁에 술을 마신 다음날,

친구의 차에 무의식적으로 올라 내연산으로 향했다.

그는 예전부터 등산의 효용성에 대해 설파했었고, 나는 무용성에 대해 주장했었지만,

녹색을 보러 내려온 길에서 친구가 고르고 고른 산을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12 폭포 중에 4번까지만 가자던 친구는,

등산에 익숙하지 않은 나를 위해 1번 폭포의 앞에서 한참을 쉬었다.

낙폭은 낮았지만, 유수를 가둔 소가 너른 폭포였다.

요란한 감탄보다는 조용한 심호흡이 어울리는 풍경 앞이었다.



폭포를 등지고 본 풍경에, 시절(時節)이 가득했다.


친구는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고, 벌써 여름의 온도에 가까워진 볕은 자신의 방향을 찾아 내려쬐고 있었다.

여림을 넘어서고 있는 녹색은 나무마다 위치마다 자신의 채도를 달리하며 무럭무럭 퍼져나가고 있었다.

위태로움 따위는 겪어본 적 없는 듯한 바람 소리와 새소리가 번갈아 공간을 채우고 있었고,

조그만 움직임에도 발 밑의 돌들은 기분 좋게 달그락댔다.  

등산로의 사람들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를 공유하며 오가고 있었다.


"내가 이 산에 다시 올 일은 죽을 때까지 몇 번 없겠지?"

"그렇겠지. 아마 이번에 마지막일 수도 있고."


다시 걷기 시작했을 때 나는 친구에게 물었고, 친구는 답했다.

둘 다, 질문과 답을 했다기보다는 혼잣말을 한 기분이었다.



목표했던 4번 폭포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짧은 구름다리를 건너자 높은 암석 벽에 둘러싸인 폭포가 나타났다.

폭포가 가장 잘 나오는 지점에서는 중년의 부부가 사진을 찍었고

그림자가 가장 잘 드리워진 지점에서는 남자 둘이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물 떨어지는 소리 외의 모든 소리가 음소거된 듯했다.

우리가 오고도 한참을 쉬던 그들이 사라진 후, 폭포 앞엔 우리 둘만 있었다.


다다르고, 머무르고, 등을 돌려 떠난다, 는 단순한 과정을 반복한다.

우리도, 풍경도, 우리의 풍경도 다 같은 입장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랑하듯 우리가 보내는 시절들은, 그 자체로만 떼어놓으면 별다른 의미가 없는, 우리를 위한 도구일지 모른다.

자신이라는 텅 빈 마당을 둘러싸고 볼거리와 질문거리를 툭툭 던져주는 그런.


뒤늦게 폭포의 아랫부분에 떠있는 무지개를 발견했다.

신이 나서 여기에 무지개가 있다고 말하는 내게, 친구는 별다른 말없이 웃기만 했다.

나의 시절과 그의 시절이 다르지 않았다.  



내려가는 길의 목표는 명쾌했다. 산채비빔밥에 호박전.


친구가 애정 하는 식당에서 밥을 먹고 난 후,

바닷가에 있는 카페에 들른 후 우리는 각자의 집으로 헤어질 것이다.

그리고는 몇 달 혹은 몇 년 후에나 만날 것이다.


그 사이 우리는 각자의 시절을 살겠지만, 그건 우리 관계에 별다른 영향을 주진 못할 것이다.

다시 만났을 때 우리가 다르게 지내온 시절들은 서로가 풀어낼 이야깃거리가 되고,

우리는 그 순간의 시절을 즐기면 될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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