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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Apr 29. 2022

산북빵차

#경북 문경

그 무엇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딱히 들지 않는다. 가만히 앉아서 생각이 흘러가는 대로 놔둔다. 문득 이것은 꽤 괜찮은 노후 대비라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흐를수록 몸을 움직이는 것은 점점 어려워질 것 아닌가.


-'인생의 하루' 中, 장기하 산문집 「상관없는 거 아닌가」





차를 타고 휙 지나치다가 본 간판이 마음에 들었다.

조그만 읍내의 끝자락에 덩그러니 세워진 간판.

정작 가게는 보진 못했는데, 저렇게 명료한 이름의 빵집이라면

뭐를 먹어도 만족스럽겠지 싶었다.


그 읍내 근처의 목적지를 찍고 가는 길이었고,

그 목적지라는 게 사진만 몇 장 찍으려고 한 곳이었기 때문에

잠시 세울까 했는데, 이 짧은 생각을 하는 동안에 읍내가 끝나고 차를 세우기 애매한 국도가 이어졌다.

결국 목적을 한 곳에서 사진을 찍고 다른 목적지를 찍으려고 하다가 길을 되짚어가기로 했다.


시간이 오전 11시를 훌쩍 넘어 점심에 가까웠고,

혼자 다니는 길에 허기를 때워야 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왠지 입안에서 '산북빵차'라는 말이 맴돌았기 때문이다.



되돌아와 간판 앞에 차를 세우고 가게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간판 바로 옆에는 도저히 장사를 했던 흔적이 보이지 않는 창고가 하나 있었고,

조금 더 안쪽에는 아무리 봐도 가정집으로 보이는 집이 있을 뿐이었다.

길 건너편에도 산북빵차라는 철제 입간판이 있는 걸 보면 영업을 하는 가게일 텐데 희한했다.


현지 주민만 아는 어느 골목을 따라 들어가면 나오는 조그만 점방을 상상하고 돌아다녀볼까 했지만,

여름 볕에 가까운 정오의 더운 날씨 때문에 그럴 생각까지는 들지 않았다.

그래서 기둥 옆에 핀 라일락의 향을 맡고 사진 몇 장을 찍고 다시 차에 타려 했다.



그런데 바로 앞에 있는 방앗간의 겹벚꽃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그걸 한참 감상하고 있다 보니, 방앗간에서 흘러나오는 고소한 깨 볶는 냄새가 코로 들어왔다.

차는 거의 지나다니지 않는 한낮의 읍내였다.


뭐가 급하다고.


차 문을 도로 닫고 걸음을 느린 모드로 바꿨다.

생각해보면 정말이지 급할 게 없는 길이었다.

주장이 강한 동행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몇 시까지 어디에 꼭 가야 하는 일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포항으로 가는 도중에 고속도로가 지겨워서 나와서 돌아다니는 길이었으니,

어디서 시간을 보내도 무방했다.

그런 이유로, 봄꽃이 만개한 나무가 있는 읍내는 꽤 훌륭한 곳이었다.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방앗간 앞에서 사진을 여러 장 찍어도 방앗간의 문은 열리지 않았고,

걸어 다니는 사람도 없었다.

뭐랄까, 이렇게 한 계절이 흘러가도 분위기가 그대로일 것 같은 동네였다.



그늘을 골라 잠시 걷다 보니, 길 건너 농협 앞에 찐빵과 만두를 파는 트럭이 보였다.

정오에 가까운 시간의 허기는 여전했고,

딱히 들어갈 만한 식당도 보이지 않았기에 자연스럽게 트럭으로 향했다.


힙한 이름과 힙한 간판을 자랑하던 산북빵차였다면 만족감이 조금 더 컸겠지만,

여하튼 <산북 읍내>에 위치한 <빵>을 파는 <차>였으니, 딱히 다르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 생각이 결과적으로는 맞았다.)


40대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앉아있다가 반갑게 맞았다.

3,500원짜리 고기만두 한 개와, 여러 종류의 도넛을 한데 묶어놓은 봉지 하나를 샀다.

만두를 담는 시간에 카메라를 들어 사진을 찍으려다 말았다.

주인의 손이 빨라 카메라를 들기 민망했던 이유도 있었지만,

왠지 트럭 가득한 만두와 도넛을 찍어도 특유의 분위기는 담기지 않을 듯해서였다.



여전히 사람도 차도 없는 도로를 건너 차를 향했다.

건너고 나서야 "트럭 옆 농협 계단에 앉아서 먹을걸"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만두랑 빵을 어디서 먹을 것인가에 대해 생각을 거듭하는 게 스스로 우스워서 그만뒀다.

혹여나 언젠가 비슷한 읍내에 비슷한 노점에서 비슷한 만두와 도넛을 산다면

그때 한번 시도하면 될 일이다.



읍내를 떠나 잠시 가다 보니 사람이 살지 않는 고택의 주차장이 눈에 띄길래 들어가 차를 세우고 만두 포장을 끌렀다.


손으로 집어먹으려다가 뜨거워서, 아주머니가 같이 싸준 나무젓가락을 꺼냈다.

그리고 나무젓가락 종이포장에 '산북빵차'라고 쓰여 있는 걸 그제야 발견했다.

아, 그 집이 그 집이었구나.

(며칠 지난 지금 글을 쓰면서 사진을 보니, 간판의 빨간, 노랑 스트라이프 무늬가 트럭의 덮개 포장에도 있었다)


한낮에 달궈진 차 안에서 먹는 뜨거운 만두는 맛있었다.

처음 가는 동네에서 '맛집'을 굳이 찾아가지 않는 성격이기에,

이렇게 우연히 간판을 보고 멈춰 선 가게 같은 곳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곤 한다.

이런 게 행운이고, 이게 진정한 나만의 맛집이야, 같은 단순한 결론.

유치하지만 나의 만족감을 위해선 어쩔 수 없다.



취한 상태로 숙소에 와서 짐을 정리하다가, 남은 나무젓가락 두 개가 눈에 띄었다.

평소라면 가운데를 분질러 쓰레기통에 넣었겠지만, 왠지 아까워 버리지 않기로 한다.


언젠가 누군가와 문경을 지날 일이 있을 때,

아마 난 득의양양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거기 읍내로 빠져서 가다 보면 산북빵차라고 있는데 말이야. 거기 만두가 죽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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