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일 성수동 산책
아주 오래 혼자 두지 않는 한 빵은 쉽게 속이 상하지 않으며
빵은 어디를 뜯겨도 표정 없는 평범한 단면을 보여 준다
-詩 '빵' 중, 문보영 시집「책기둥」
"어? 형!"
"어? 뭐야."
경기도 고양시에 사는 나와 신림동에 사는 대학 선배가, 휴일 정오에 약속 없이 성수동에서 만날 확률은 매우 낮을 텐데, 되려면 그렇게 된다. 나는 약속시간 두 시간 전 도착해 골목을 산책하는 중이었고, 그는 일행 한 명과 골목 구석에서 담배를 피우는 중이었다. 미세먼지 하나 없이 좋은 날이었지만 피부가 따가워질 정도의 볕이 내리쬐는 한낮. 나는 골목의 좁은 그늘을 골라 걷고 있었고 그 형도 창고형 건물의 그늘에 있었다. 잠시 서서 시답잖은 얘기를 했다. 며칠 전에도 카톡을 하던 사이여서 어색한 안부 교환 따위는 없었다.
선거일인 공휴일, 사람들은 조금씩 불어나는 중이었고 대부분 둘 혹은 셋씩 짝을 지어 다녔다. 인사를 하고 다시 골목으로 걸어갔다.
성수동은 소비 취향에 맞게 새로이 개발된 풍경과, 생산의 조건에 맞게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풍경이 공존하는 곳이다. 공업적 용도에 맞게 정직한 직선으로 공간을 확보하며 올라간 건물들은 여기저기 새로운 소비자를 위해 외관을 바뀌고 있다.
누군가는 그런 소비 트렌드 또한 낡고 있는 중이라고 말하지만, 여전히 새로 여는 가게들은 저마다의 스타일이 있고, 그로 인해 저마다의 영역을 골목에 더해주고 있다.
성수에 자주 오지도, 와서도 성실하게 소비를 하지도 않는 나 같은 산책자에게, 이런 풍경은 좋은 눈요깃거리이자, 굳어가는 시선을 이리저리 흔드는 좋은 기회가 된다.
경계가 확실한 풍경은 난립하지 않는다.
경계의 안에서는 최대한의 기술을 발휘하지만, 경계 밖으로는 나가지 않는다.
내 영역에서는 맘대로 하지만, 그쪽에게 불편함을 주진 않겠어요, 같은 이런 태도는,
어찌 보면 무심함이겠지만, 동시에 친절함이기도 하다.
그런 독립적인 것들이 이곳의 골목들을 '성수'롭게 만든다.
내처 걷자니 여전히 약속시간이 많이 남아있어서, 중간중간 멈춘다.
당연히, 멈춰야 하는 장소가 따로 정해져 있진 않다.
되도록, 한낮이 달궈놓은 양지를 피해 그늘에 멈춰 선다.
그늘에서 보는 햇볕 가득한 풍경은, 그 안의 선명한 소품들로 인해 하나의 형태로 뭉뚱그려져 보인다. 그런 걸 누구는 분위기라 부르고, 누구는 취향이라 부른다.
12시를 조금 넘은 시간, 이름이 있는 집으로 보이는 곳엔 줄이 길게 늘어져있고, 그렇지 않은 곳에도 테이블이 거의 차 있다. 먹고 있는 사람들도, 기다리는 사람들도 즐거워 보인다.
휴일에도 사람들은 점심시간에 맞춰 식당을 찾는다는 사실은 조금 귀엽다.
어느 웹소설에 나온 표현처럼, '한 번 흘려보낸 식사는 죽을 때까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모두 공유하고 있는지 모른다.
빈 공간에 구비해둔 의자는 깨끗이 닦여 있다.
누군가는 반기고, 누군가는 설레며,
골목이 이어진다.
어느 구석에 친절히 새겨놓은 화살표를 보면서, 그 방향에 무엇이 있는가를 따라가기보다,
뜬금없이 수학 문제를 상상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수학 문제를 풀었던 건 언제였더라.
적어도 그때는 맹목적인 목표라도 있었는데,
그래서, 오답을 줄이고 정답을 늘리려는 단순한 방향성이라도 있었는데.
산책 중이었기에, 굳이 생각의 흐름을,
요즘의 뒤죽박죽, 모호한 내 상태로 이동시키지 않는다.
약속 시간에 맞게 약속 장소의 근처에 도착한다.
여전히, 배회하고 싶은 마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늘은 아마, 계속 걸음이 이어질 듯하다.
어딘가로 향하는 사람들이 골목을 지난다.
어쩌면 나처럼 저 사람들에게도, '어딘가'가 꼭 '그 어딘가'가 아니어도 될지 모른다.
공휴일에, 성수동 골목이면 더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