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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May 07. 2021

나이 듦이란 낯선 모욕

#영화 「크레이지 하트」

김씨 / 전 거리를 떠나지 못해요. 제게 있는 조금 남은 다리론 멀리 못 가죠

파출소 직원 / 조금 남은 다리로도 충분해. 누구나 조금씩 남아 있는 부분으로 산다구


- 시극「내가 가장 아름다울 때 내 곁에 사랑하는 이가 없었다」中, 김경주



*영화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게 있다.

나이 듦.


예전에는 신경 쓰지 않던 것들을, 이제는 이해해야 한다고 느낄 때마다,

우리는 스스로가 나이 들고 있음을 깨닫는다.

세상은 여전히 난해하고, 우리의 이해력은 아직 그대로인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늙음은 모욕으로 다가온다.



한물 간 가수 배드 블레이크는 전국을 돌며 작은 무대에 선다.

좋아하는 술 한 병 살 돈도 없는 그가 가진 건, 낡은 차와 기타 하나가 전부.

하지만, 볼링장 한편에서 공연하더라도, 주최 측에서 마련해준 낡은 모텔방을 전전해도

그의 자존심은 꺾이지 않는다.


그런 그의 유일한 안식처는 술이다.

밥을 먹을 때도, 공연 전에도 심지어 공연 중간에도, 그는 술병을 입에서 떼지 않는다.

그의 음주는 만취해서 곯아떨어지 것이 목표가 아니다.

취기를 끊임없이 유지해 자신의 구차함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 목표다.


그가 계속해서 생각하지 않으려 하는 그 구차함은,

바로 자신의 늙음이다.


과거 수많은 명곡을 썼던 그에게 에이전시와 친구, 후배 모두 곡을 쓰라고 하지만,

그는 한마디로 일축한다. 이제 나이가 들어서 영감이 사라졌다고.



그런 그의 앞에 한 여인이 나타난다.


소도시의 신문사에 다니는 그녀는, 공연을 하러 온 배드 블레이크를 인터뷰하러 온다.

늘 그랬듯, 배드는 그녀를 하룻밤 잠자리 상대로 생각하지만,

그녀는 완강하고, 그것이 둘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동력이 된다.

그리고 배드는 다시 곡을 쓰기 시작한다.



주인공 배드는 꿋꿋해 보이지만 스스로를 연민한다.


예전과 다른 사람들의 대접, 과거의 노래로만 채우는 무대,

모아놓은 돈도 돌아갈 가족도 없는 자신의 현재를 끊임없이 마주하면서,

그는 자신의 늙음을 한탄한다.


대충 이번 무대만, 늘 하던 대로 오늘 하루만.

왕년의 스타에게 노년 단조롭기 그지없다.



영화를 보다 보면,

우리는 주인공 배드가 늙은 자신을 낯설어한다는 걸 알게 된다.


그의 모든 건 전성기의 무대에 있는데, 현실에서의 그는 의사가 심장마비와 뇌졸중을 걱정할 정도의 망가진 몸으로 별 볼 일 없는 무대 일정을 소화할 뿐이다.

그는 술에 취함으로써 그 모든 것을 별거 아니라는 듯 대하지만,

그의 공허한 눈빛과 처진 어깨는 늙음이라는 낯선 모욕 앞에서 당황하는 한 남자를 보여준다.



영화의 중반 이후, 그러니까 싱글맘 진과의 관계가 시작된 이후,

배드는 자신이 대충 유지하던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

엉망 집을 정리하고 젊었을 때처럼 소파에서 침대에서 포치에서 자신만의 노래를 만든다.


이전까지의 그가 늙음을 겨우 감내했다면,

이때부터의 그는 자신의 현실을 마주 본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그는,

세상이 그에게 씌운 모욕을 하나씩 지워나간다.


늙음, 혹은 낡음은 그의 기타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음(音) 앞에서 의미를 잃는다.

그가 진과의 새로운 관계를 꿈꿀 때도 마찬가지다.

이미 실패한 네 번의 결혼생활과 다를 거라고 확신하고 새로운 열정을 불태운다. 



우리는 조금씩 상실돼가는 스스로의 모습을 낯설어한다.


스스로의 늙은 모습에서 눈을 돌리거나, 억지로 덮어버리고 싶어 한다.

우리에게 가해지는 세상의 모욕보다 더 큰 모욕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셈이다.


하지만, 주인공 배드 블레이크가,

잃어버린 무엇에서 눈을 돌려 남아있는 무엇을 똑바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처럼,

우리는 우리 안에 남아있는 무언가를 살펴봐야 한다.


사라져 버린 것들은 사라진 이유가 있고

남아있는 것들은 남은 이유가 있다.


우리가 남아있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사랑할 때,

모두에게 공히 찾아오는 나이 듦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그럴 때 늙음은 모욕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일 뿐일 것이다.



* 과도한 설정이 없다는 것이 장점인 영화다.

알코올 중독일 정도로 술을 즐기고 무대에서의 실수도 있지만, 파국은 보여주지 않는다.

퇴물인 그를 업신여기는 투의 사람들이 등장하지만, 눈살을 찌푸릴 정도는 아니다.

그는 모든 것을 놓아버리거나 폭발하지 않는다.

어설픈 마초성이나 가족주의로의 봉합도 없다.


* 이 영화는 음악 영화이다.

굳이 컨트리 음악에 익숙하지 않더라도, 아름다운 음악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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