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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May 05. 2021

이유는 길 위에서 지워진다

#영화 「노매드랜드」

*영화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떠나고 싶어서 떠난 사람과, 

떠날 수밖에 없어서 떠난 사람은 다르다. 


전자는 목적지가 확실하고, 후자는 갈 곳을 모른다. 

전자는 기대에 가득하고, 후자는 불안에 차 있다. 

그리고, 전자는 돌아올 곳을 예비해두지만, 후자는 돌아갈 곳을 버리고 떠난다. 


영화 '노매드랜드'의 주인공 펀은 후자 쪽이다. 



내용은 단순하다. 


공장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사막의 도시에서 살던 펀은 남편 보가 죽고 한동안 마을에 머물지만, 

공장마저 문을 닫자, 낡은 밴(RV) 한 대를 구해 길을 떠난다. 

그녀에겐 챙길 가족도, 돌아올 집도 없다. 


그녀는 밴에서 먹고 자며 파트타임으로 일을 하며 생활을 이어간다. 

아마존 물류창고에서 일하며 만난 친구의 소개로, 또 다른 밴 생활자들의 모임을 찾아가게 되고

그곳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난다. 


영화의 후반부, 자신과 같은 밴 생활자였던 제임스가 같이 정착하자고 하지만, 

그녀는 며칠 고민한 뒤 떠난다. 

그리고는 자신이 처음 길을 떠났던 도시로 돌아와, 

보관해뒀던 모든 세간을 처분하고 다시 밴에 오른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아마, 

떠나고 싶은 마음과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뒤섞일 것이다. 


모든 것을 버리고 아무런 보장이 없는 삶을 택하는 건 용기 있는 일이다. 

비록 그녀를 돌봐줄 가족도, 충분한 사회보장도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택했다고 해도. 


그래서인지, 

영화 내내 그녀는 화면의 정중앙에 있다. 


그녀는 길의 정가운데를 걷고, 밴은 길의 중간을 가로지른다. 

마치 미지의 세상 가운데를 힘차게 가르듯. 



남편의 죽음과 실직을 겪은 후 목적 없는 여행을 하는 그녀를 보고 있으면, 

역설적으로 삶의 질감을 더 가깝게 느낄 수 있다. 


모든 것을 버린 후(혹은 잃은 후) 떠난 곳에서, 그녀는 모든 것을 응시한다. 


관객은 그녀가 바라보는 것을 같이 보는 동시에,  그녀의 눈을 볼 수 있다. 

그 눈은 모든 것으로 스며들지만 어떤 것에도 오래 머물지 않는다. 



화면 안의 그녀는 늘 사이에 있다. 


일과 여행 사이에, 머묾과 떠남 사이에, 

무료함과 절박함 사이에, 관계와 단절 사이에, 

그녀는 살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길게 응시하는 영원의 풍경처럼, 

그녀는 삶과 죽음 사이를 떠돈다. 



그녀는 기억으로 남아 있는 지난 삶을 버리기 위해 길을 떠난다. 

그건 기억이라는 능력을 형벌처럼 가지고 있는 우리의 특권이다. 

하지만 영화가 천천히 진행될수록 우리는 깨닫는다. 


그녀는 버리려던 것이, 그녀를 지탱하고 있었음을. 


그래서 우리는, 영화의 후반부 낡은 밴 안에서 남편 보를 떠올리며 

'기억되는 건 남아 있다'라고 말하는 펀의 모습을 보며 안심할 수 있다. 


그리고 그녀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새롭게 만든 

따뜻한 기억으로도 아마 그녀는 남은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이런 삶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 중 하나는, 마지막 작별인사가 없다는 거예요. 

항상 이렇게 말하죠. 길에서 다시 만나자고."


영화의 마지막, 밴 생활자들에게 도움을 주는 구루 같은 사람이 펀에게 말한다. 

그는 아들을 먼저 떠나보낸 후, 일상을 버리고 떠나왔다. 

죽은 남편에 대한 기억을 떠나보내지 못하는 펀에게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당신은 남편을 다시 볼 거예요. 

그리고 그때 남편과 함께 당신의 삶을 기억할 수 있을 거예요."



길 위의 인연은 바람처럼 모이고 흩어진다. 

영화는 엔딩 크레디트 전에 이렇게 자막으로 말한다. 


"길 위에서 만납시다 (see you down the road)"


노매드의 길은 그렇게 또 다른 삶과의 만남을 마련해두고 있다. 



* 안전한 영화다. 

길 위에서의 위험(폭력 혹은 그 이상의 무엇)은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다. 

감정적인 폭발 혹은 무너짐도 없다.  


* 화면이 아름다운 영화다. 

매 씬, 영화의 스틸을 훔쳐 인스타그램에 저장하고 싶을 정도로


* 그리고, 영화에 가득한 은유만으로 

삶을 관조적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친절한 영화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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