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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Nov 17. 2021

아이고, 골동품을 가져오셨네

#버릴 것과 채워 넣을 것


이사를 몇 주 앞두고, 이것저것 버리는 중이다.

나한테 이런 결단력이 있었던가, 스스로 감탄할 정도로 막무가내로.


오늘 아침에도 한 무더기의 살림을 버렸다.

언제 고장 났는지 모르는 의자와 고장 난 걸 왜 주워왔는지 모르는 의자,

술 먹고 집에 오다가 골목에서 낑낑대고 가져온 책장에,

15년 동안 아무 이상 없다가 이사를 결정하고 나니 갑자기 보온기능이 고장 난 밥솥,

거기에 어설프게 손보다가 망가진 선풍기와 가방, 나무판자들까지.


집에 들이고 나면, 처음부터 이 집에 있었던 것 같은 것들이었는데,

폐기 스티커를 붙이고 골목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모습을 보니 미련이 정리됐다.  

몇 주 뒤 이사를 가고 나면 나 자신에 대해서도 이런 느낌이겠지 싶어서 위안이 된다.



많이 버려서 이제 좀 이사 가는 티가 나는 집을 둘러보다가,

문득 채워놓아야 할 것들이 떠올랐다.


그중의 하나가 형광등이었다.

나 다음에 누가 이 집에 살지 모르지만, 끝이 까맣게 변한 형광등만 두고 가는 건 뭔가 민망하다.

거기에, 작은 방 형광등은 얼마 전부터 깜빡거리기까지 했으니.



15년 가까이 살았으니 분명 내가 한 번쯤 갈았을 법한데,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의자에 올라서서 손으로 더듬더듬해서 덮개를 벗기고, 도넛 모양의 형광등을 떼어낸다.


덮개 안쪽은 의외로 벌레들이 몇 마리 없었지만,

형광등을 떼어낸 곳은 군데군데 낡아있다.

낡아도 제 역할을 그만둔 적이 없으니,

전기기구에 대한 지식이 없는 나로서는 고마울 따름이었다.


큰 방에서 막대형 형광등도 떼서, 새 형광등을 사러 나갔다.

골목에 있는 전기집에서 사다가 갈아 끼면 끝일 일이었다.

하지만, 그 단순한 일이 꽤 긴 여정이 돼버렸다.


골목 아래에 있는 전기집에 갔더니, 이제 형광등은 취급하지 않는다며 미안해했다.

들어갈 때부터 짖으면서도 꼬리를 흔드는 말티즈를 쓰다듬어주고 나왔다.

좀 더 아래에 있는 철물점에 가서 떼어낸 형광등들을 보여주니,

막대 형광등은 있지만 둥그런 형광등은 없다고 했다.

계산을 하는 나에게 철물점 주인은 이렇게 덧붙였다.


'그거 단종돼서 못 살 텐데......"


철물점을 나와서 잠깐 고민했다.

어딘가에 있을지 모르는 형광등을 찾아다녀야 하나,

아니면 집에 돌아가 모른 척 깜빡이는 형광등을 다시 껴놔야 하나.

집 앞 골목까지만 허용되는 추레한 복장이어서 고민이 조금 길어졌지만,

다른 가게들을 뒤져보기로 했다.

이 집을 형광등이 깜빡이는 상태로 남겨두는 건 역시나 내 취향은 아니니.



오랫동안 한 동네에 산 짬을 발휘해 머릿속에서 동선을 짰다.


왠지 오래된 형광등이 남아있을 것 같은 곳을 먼저 택했다.

낡을 대로 낡은 외관에, 수십 종의 제품명을 유리에 덕지덕지 붙여놓은 곳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의외로 젊은 주인이었다.

둥근 형광등을 보여주자 바로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건... 없어요. 근데 그거 오래돼서 찾기가......"


길을 여러 번 건너, 옆 동네로 갔다.

오래된 집들이 많으니 오래된 형광등 있겠지.


산책하다가 봐 뒀던 철물점에 들어가니 주인아저씨가 누워있다가 일어났다.

세 번째 '존재'를 거절당한 원형 형광등을 마약 거래하듯 꺼내서 보여주니,

아, 써크라인 그게 있었나, 하는 혼잣말이 돌아왔다.


일말의 기대를 갖고 쳐다보는 내 앞에서 주인은 박스를 여러 개 밟고 올라가

여기저기 뒤져본다. 큰 거는 있는데 작은 게 어디 있었나, 하는 혼잣말이 다시 들린다.

결국 이곳에도 없었다. 오래된 제품이란 얘기는 여기서도 덧붙였다.


이제 떠오르는 철물점이나 전기집이 없었다.

이쯤 되니 내 의지도 많이 줄어들어서, 오래간만에 산책이나 하자 싶었다.



그런데, 폐형광등이 절그럭대는 천가방어깨에 걸치고 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다 보니,

'전기 설비'라는 간판이 눈에 보였다.

여기도 종종 산책을 오긴 했는데, 저런 가게가 있는 건 몰랐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소규모 전기 공사를 하는 가게인 듯했다.

앞서 갔던 철물점들처럼 물건들이 그득하지 않고,

한쪽 벽 선반에 전구와 장치가 종류별로 정리돼 있을 뿐이었다.


마스크를 쓰며 맞이하는 주인은 현장 작업을 오래한 듯한 검은 피부에 단단하고 마른 체형이었다.

누군가 전기 설비를 하는 중년의 스파이를 주인공으로 소설을 쓴다면 딱 모델로 삼을 만큼.


별 기대 없이 가방에서 형광등을 꺼내며 이번엔 내가 먼저, 이런 건... 없겠죠,라고 말했다.

남자는 내 손에 든 형광등을 보면서 기분 좋게 웃으며 대꾸했다.


"아이고, 골동품을 가져오셨네."


그의 말투엔 이곳에 제품이 있다는 긍정의 의미 외에도,

일종의 공모(共謀)의 느낌이 묻어있었다.

아직도 이렇게 낡은 형광등을 쓰는 사람과 

아직까지도 이런 형광등을 구비해 놓은 사람 사이의 묘한 연결감.

진열장에서 형광등을 가져다주며 남자가 물었다.


"다들 없다고 하죠? 여기 오기 전에 몇 군데 돌지 않았어요?"


여기가 다섯 번째라고 답하자 남자가 기분 좋게 웃었다.

이게 오래돼서 일반 철물점에는 없었을 거라고, 본인처럼 전기 공사를 하는 집에나 있을 거라고.

여기 온 건 제대로 된 선택이었다는 식의 웃음을 보며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겨우 3,000원이었지만, 그보다 훨씬 귀해 보이는 형광등을 가방에 넣고 집에 돌아왔다.

내내 남자의 뿌듯한 모습이 떠올랐다.

그건 뭐랄까, 매우 그럴 법하고, 그 정황마저 닮고 싶은 자부심이었다.



의도치 않은 긴 여정 끝에 사 온 형광등은, 새것임에도 먼지가 가득했다.

즐거운 마음으로 닦았다. 이 정도쯤이야.


나한테도 남자의 뿌듯함이 전염됐는지,

등을 바로 달지 않고 한참을 책상에 둔 채로 '감상'했다.



낡은 틀에 새 형광등을 끼워 넣는다.

처음부터 이 집에 있던 느낌이 들 정도로 잘 들어맞는다.

이걸 낡은 풍경이라고 해야 할지, 새 풍경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꽤 만족스러운 풍경이었다.



형광등처럼 채워놓을 걸 채워놓는 건, 이 집에 대한 미련일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그동안 편하게 산 집에 대한 최소한의 답례 같은 거였다.


새로 이 집에 살게 될 사람이, 나처럼 형광등을 싫어하는 사람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등을 일이 있었을 때, 이 공간이 너무 낡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낡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아도 이 오래된 집이 줄 수 있는 건 많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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