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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Feb 05. 2022

목적이 확실한 볶음밥

누구든 배회할 수 있다면

목적이 따뜻하겠지


-詩 '밸브' 중, 최정진 시집 「버스에 아는 사람이 탄 것 같다」





금요일 저녁, 손님맞이를 준비한다.

설 연휴에 엄마가 싸준 송이버섯을 잘라 굽고, 올리브와 과자를 덜어놓고,

배달 온 족발과 막국수를 세팅한다.


마냥 기다리는 건 너무 강아지 같은 일이기에, 혼자 맥주를 시작한다.  

여러 사람을 상대했지만, 뭐 하나 마무리됐다는 느낌이 없는 금요일이었다.

이런 날 술자리를 준비하는 건 다행이라는 기분이 든다.



위스키로 시작한 술자리는, 와인 네 병째에 멈춘다.

주량 자랑 따위를 할 만한 나이가 아니기에,

주량 계산 따위만 한다.


위스키는 1/4병쯤 남았고 마지막에 딴 와인은 거의 먹지 않았으니,

세 명이서 각 위스키 1/4병에 와인 1병씩을 비운 셈이다.


음악은 적당한 템포 내에서 흘렀고, 안주는 적당한 속도로 없어졌다.

낮 동안의 소요가 깔끔하게 가라앉은 금요일 밤이었다.



둘을 보내고 나서, 성실하게 술상을 치울까 하다가,

그대로 박제하기로 한다.


애매하게 남은 족발과 올리브, 소시지, 반찬 등을 그대로 두고,

물에 담가놔야 할 것들만 골라 개수대에 넣는다.


금요일의 늦은 밤이었고, 몇 시간 뒤면 토요일 아침이었으니까 이 정도로 족하다.



토요일 아침마다 확인할 메일이 있어서 눈은 7시 30분에 정확히 떠진다.

긴 샤워를 하고 거실 소파에 눕는다.

고민해야 할 것들과 해결돼야 할 것들의 리스트를 떠올렸다가,

낙서처럼 선을 뭉뚱그려 놓는 것처럼 지워버린다.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룰 일도 있겠지.


그렇게 한참을 누워있다가 일어나, 남아있던 음식들을 한데 모으고 자른다.

이게 어제 생각한 메뉴였다.

남은 음식 처리로서의 목적이 확실한 볶음밥.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일반 매운 반반족발+그릴드 소시지+풋고추+마늘+그린 올리브+김자반 볶음밥, 이랄까.



손아귀가 아플 때까지 가위질을 한 재료들은 나름 균일한 크기다.

어젯밤 취한 와중에 앉혀놓았던 밥을 크게 퍼넣고 자른 것들을 때려 넣는다.

그리고, 족발집에서 보내준 쌈장과 새우젓 소스도 남김없이 팬 안으로.

어제 먹었던 맛만 반복하는 건 별로니까, 두반장도 한 수저 넣어준다.


이렇게 모조리 넣고 볶으면,

어느 한 재료의 공을 내세우거나 탓을 할 수가 없다.

심지어 누군가가 의도한 재료배합도 아니다.

말하자면, 더 잘할 수도 더 못할 수도 없는, 될 대로 돼라 식의 음식.


그래서, 이런 볶음밥은 아무 생각 없이 먹을 수 있다.



어쩌면, 회사일도 마찬가지인가 싶기도 하다.

지금 시기에 내가 고민하는 것들이, 멀리서 보면 크게 잘할 수도 크게 못할 수도 없는 것들이지 싶다.

물론 성과를 내려고 노력하겠지만, 될 대로 돼라 식의 상황은 왕왕 벌어지고,

어떻게든 수습할 해결책도 있게 마련이다.


얼마 전에, 메모를 정리하다가,

2014년 어느 시점에 '지금 고민하는 것들'을 죽 적은 체크리스트를 발견했다.

30여 개가 넘는 항목을 하나하나 보다가, 그런 별거 아닌 일들로 마음 졸여했음에 새삼 놀랐다.

그리고 다시 한번 그걸 보면서 안도했다. 그때 그랬다면 지금도 그럴 수 있겠지 싶어서.


밥을 볶는데, 어제오늘 내 머릿속을 배회하던 것들이 누그러진다.



금요일 밤을 건너온 토요일,

걷지 않은 암막 커튼 끝으로 빛이 새어 들어온다.


깨끗이 치운 술상(겸 책상)에 앉아 늦은 아침을 먹는다.

맛은 예상한 대로였고, 접시를 비운 나는 예상한 대로 소파로 향한다.

눕는 것도 목적이 확실한 편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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