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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Feb 11. 2022

양해가 되는 수준에서

#숙취와 함께하는 출근길

"머리가, 머리가 빠개지는 것 같습니다. 아버님!"

상현은 비틀거리며 일어선다.

'불민한 놈!'


-토지 6권 中, 박경리





그래, 난 아직 불민하다.


마흔이 훌쩍 넘은 나이임에도 여전히 그렇고,

술을 며칠 연속으로 마신 다음날에는 더더욱 그렇다.

(불민(不敏)하다, 의 사전적 의미인 '어리석고 둔하여 재빠르지 못하다'가 딱 들어맞는다)


그런 이유로, 출근시간을 맞추지 못할 시간에 일어났음에도,

심지어 전날 차까지 회사에 두고 와서 버스를 타야 함에도,

난 재빠른 척을 하거나 서두르지 않는다.


대신, 술기운이 여전한 상황에서 천천히 라면을 끓여먹

새벽 3시에 했던 샤워를 다시 한다.


집을 나서서 버스를 탈까 하다가, 버스 도착시간이 10분이 넘게 남았다는 걸 알고는 그냥 걷기로 한다.

12월에 이사 온 이 집에서 회사까지는 걸어서 30분이면 되지만,

난 성실하게 걸을 생각이 없다. 숙취가 남아있으니 탓을 하기에도 좋다. 이런 아침도 있어야 한다.  



매일 그런 건 아니고, 과하게 그런 것도 아니다.

많아봐야 한 달에 한두 번 정도이고, 늦어봐야 한 시간 남짓이다.


나의 이런 성향을 편하게 받아들인 건 얼마 되지 않았다.


꽤 오랜 기간 난, 평범하게 성실한 회사원이었고, 성실하게 평범한 소심인이었다.

특별한 계기가 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가끔 이렇게 게으름을 피워도 큰일 같은 건 일어나지 않고,

누군가들이 나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는 걸 알면서부터 마음을 놓았다.


될 대로 돼라, 라기보다는,

할 만큼 하고 있잖아, 정도의 마음가짐이랄까.  



나로 인해 무언가가 어그러지는 것,

나로 인해 누군가가 불편해하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 탓에,

할 만큼 하는 게 어느 정도까지인지 알기까지 오래 걸렸다.

어떻게든 일을 진행했지만, 불필요한 감내와 부적절한 회피가 반복됐다.


하지만, 여러 사건과 여러 사람들을 겪으면서

나의 일이 나의 기대를 넘어서거나 나의 불만을 이해해주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고

당연히 그 사이에서 내가 '만한 수준'도 더듬더듬 알게 됐다.



내가 할 만큼 한다는 건, '양해가 되는 수준'이 아닐까 싶다.


일을 같이 하는 누군가가 나를 양해하는 수준인 동시에,

내가 누군가를 양해하는 그런 수준.


이 정도에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100% 의탁하거나 신뢰하지 않아도 된다.

인과에 의한 상황 혹은 돌발상황이 발생했을 때,

서로의 사정을 이해하고 상황을 해결할 의지가 남는 정도면 된다.


'내 편 아니면 니 편' 혹은 '성공 아니면 실패'에 익숙한 사고방식에서는 뭔가 미적지근한 얘기겠지만,

오래 직장에 다녀본 결과, 99%의 일은 성공과 실패 중간지대 어디쯤에서 시작해,

내 편과 남의 편 사이 어디쯤의 관계로 끝이 난다.



회사까지 이어진 하천 길을 택해 걷는다.

하천의 한쪽눈이 녹았고, 다른 쪽엔 눈이 남아있는 데가 꽤 있다.

눈 밟는 소리가 좋아 빛이 잘 들지 않는 쪽을 택해 걷는다.


숙취가 남은 상태의 발걸음은 빠르지 않고,

그런 까닭에 위에서 미끄러지는 정도는 내가 감당만하단 생각 때문인지도 모른다.



회사에 가까워지면서, 사무실에 가면 해야 일들이 떠오른다.

몇 달째 붙잡고 있던 일이 몇 주 뒤 마감이지만, 아직 '중간단계'에 있는 것들이 수두룩이다.

어느 정도까지 내가 양해하고 양해받을 있는지를 천천히 생각해본다.

하나씩 정리하고 머리속으로 라벨을 붙이다 보니 만만해졌다.


다행히도 1시간 남짓 늦게 회사에 도착할 즈음에 숙취는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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