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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Feb 12. 2022

이런 철딱꼬락서니 하고는

언제나 그림자의 질을 결정하는 건

빛이 아니라 벽이었다.


-'다섯 개의 물체주머니를 사용하는 자연 시간' 中, 김경주 시집 「기담」





흔한 회사 얘기와 흔한 사람들 얘기가 이어지는 흔한 술자리.

고개를 끄덕이 공감을 하다가, 어느 순간 혼자 구석에 앉아있는 기분이 들곤 한다.


잠깐 전원을 끈 상태처럼.


그럴 때마다 나의 광원(光源)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내내 빛을 내기엔 허덕여서 잠시 불을 끄고 빛을 모으는 중이라고.



요즘 혼자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내가 사람들과의 관계를 피곤해한다는 생각이 부쩍 들고 있다.

업무 상으로 소개를 받은 사람에게 전화하기를 꺼리고 아이스 브레이킹 자체를 힘들어한다.

눈을 보고 웃으며 대화할 필요가 있는 자리에서도, 시선은 아래로 향하고 말의 끝은 뭉개진다.


나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대충 이해해주겠지만, 처음 보는 사람은 당황스러울 법하다.

그런 상황에서는 속으로 이렇게 말하곤 한다.


이런 철딱꼬락서니 하고는...


 

그건 자책 같은 건 아니다. 그 반대다.


내가 철딱서니 없이 사회성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이고,

관습적으로 필요한 말과 행동을 적시적소에 하지 못하는 꼬락서니라는 게,

오히려 위안이 된다.


애초에 약한 광원을 가진 사람으로서 난 최선의 방법을 찾은 게 아닐까.


에너지가 강한 사람은 나와 다르게 행동한다.

그들은 자신 주장을 내보임에 거리낌이 없고,

사회적으로 필요한 말을 하며 친분을 쌓는 걸 즐거워한다.

그들에겐 그런 행동은 자연스럽고 어울린다.


반대로 나처럼 잠깐잠깐 전원을 꺼야 하는 사람은,

처음 처해진 상황에 조심스럽게 적응하고,

최소한의 제스처만으로 자리의 어느 구석에 머무르려 한다.

그리고 그게 성공하면 천천히 여유를 갖게 되고.

말하자면, 그런 변변찮은 꼬락서니로, 철딱서니 없이 쭈뼛대는 건

나 같은 사람에게 매우 자연스러운 전략일 뿐이다.

 


그건, 어느 시인이 표현한 것처럼,

그림자를 만드는 빛과 그림자가 비치는 벽의 차이 정도가 아닐까 싶다.


빛을 내는 게 편한 사람은 빛을 내 그림자를 만들고,  

그림자를 받아들여 형상을 만드는 게 편한 사람은 벽이 되는 것뿐이다.


빛의 입장에서건 벽의 입장에서건,

어느 순간 사라질지 모르는 그림자는 소중하고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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