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brunch
매거진
클리어 화일
실행
신고
라이킷
15
댓글
공유
닫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브런치스토리 시작하기
브런치스토리 홈
브런치스토리 나우
브런치스토리 책방
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너무 다른 역할
Mar 16. 2022
노잼 신도시
칠 주나 팔 주 동안 어미와 함께 지낸 새끼 고양이들은 먹이를 잘 먹고, 자신감도 있다.
하지만 물론 재미는 없다.
-산문집 「고양이에 대하여」中, 도리스 레싱
작년 말 회사의 이전과 함께 집까지 옮겨 온 이 동네는 신도시다.
대단위 아파트 단지와 구획이 잘 정비된 주택단지가 맞물려 있고,
주차장과 진입로가 넓은 대형 쇼핑몰
들
이 지근거리에 있다.
하천의 양변으로 도보 산책로와 자전거도로가 구분되어 닦여 있고,
계획적으로 만든 넓은 신작로(?)가 직선으로 이어진다.
몇 구역에 남아있는
구시가
동네의 골목도 깨끗하고,
상당 부분이 신축빌라로 바뀌면서 전체적으로 다니기에 편하다.
신도시답게 익숙한 브랜드의 점포들이 즐비하고
사이사이 젊은 부부나 독신들을 위한 소규모 반찬가게며 식당들이 생겨나고 있다.
그럼에도 사람과 차
의
동선은 엉키지 않아서 길들은 복잡하지 않다.
하지만, 영 재미가 없다.
처음엔 단순히 '익숙했던 술집이 없어서'라고 생각했었다.
오래된 동네, 그러니까 회사가 있던 곳이건 집이 있던 곳이건 간에
오래 살며 다니던 식당이며 술집, 하다못해 마트나 미용실, 서점 같은 것들이 한꺼번에 없어진 상실감 같은 게 아니었을까 싶었다.
그래서 해결책도 단순하게 '익숙해지면 되겠지'였고.
그런데 4개월이 지나면서도 여전히 새로 온 동네가 노잼이다.
분명 예전에 살던 혜화동보다 길도 깨끗하고 풍경도 여유로운데
뭐랄까, 돌아다니는 맛이 없다.
신도시는 순하다.
토목공사부터 계획적으로 조성된 이곳은 많은 사람들이 편하게 살기 위한 곳이다.
물론 모든 동네가 사람들이 살기 위해 만들어졌겠지만,
처음부터 주거만을 위해 만들어진 신도시는 특히나 사는 데 편리한 요소만을 남겼다.
사람들도 차들도 조용히
풍경을 채운다
.
예전에 살던 동네를 포함해 오래된 동네는 다르다.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식당
과
가게가 생기고, 그러다 보니 다시 집이 늘어나고
집이 늘어나니 골목을 손보는 식이
다.
오래된 가게가 하나씩 새로운 가게로 바뀌면서 오래된 풍경과 새로운 풍경이 자연스럽게 섞
인
다.
낮은 집을 부수고 새로운 집들이 들어서는
것
도 비슷한 방식이어서,
구불구불한 골목길 양쪽으로, 낡은 집과 덜 낡은 집, 새로 올라간 집과 새로 올라간 지 좀 된 집들이
질서 없이 이어
진
다.
주거만을 위한 곳이 아니
기에, 사람들도 정착이 유일한 목적이라기보다는 머무른다는 느낌이 강했다.
오래된 동네의
식당과 술집,
편의시설들이 제각각 다른 연령대의 타깃이 있듯이
주거지역
에
있는 집들에도 20대 대학생들부터 노부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말하자면, 어색하지도 불편하지도 않은 무질서가 일상이었달까.
14년이 넘게 그런 왁자지껄한 풍경에 익숙해있었으니,
순하디 순한
신도시의 거리가 재미있을 리가 없다.
재두루미(맞나..?)가 노니는 천변을 따라 걷는다.
오늘도 평화로운 신도시의 출근길이다.
어제의 숙취는 심하지 않고 이미 늦은 출근시간은 왠지 더 느리게 흐르는 기분이다.
주머니를 뒤적이다 보니 어제 술을 마신 중국집에서 받은 일회용 마스크가 나온다.
계산을 하면서 취한 내가 마스크를 어디에 뒀는지 찾지 못하자, 주인아주머니가 문 밖까지 따라 나와서 건네준 마스크다.
대장부 스타일의
아주머니가 나를 알은체한 지 꽤 된다.
회사 사람들과 이런저런 조합으로 몇 번 술을 마시러 가면서 눈에 익은 모양이다.
"오늘은 또 새로운 사람들과 오셨네?"같은 멘트도 자연스럽게 던진다.
오래 살던 동네에도 이런 곳들이 몇 군데 있었는데, 이 동네에선 이 중국집이 처음이다.
무심한 듯한 환대는 반갑기 그지없다.
"내가 사람들을 재미없어하면 사람들은 나를 얼마나 재미없어할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한다.
표정을 숨기고 사는 타입이 아니기에 무료한 표정을 지으면 보는 사람도 따분해질 것 같다는 그런 생각.
지금 사는 이 동네가 노잼이라고 말하는 나도 노잼이겠지 싶다.
4개월 산 동네가 재미없다고 말하는 건 어쩌면 나한테 익숙하지 않다고 칭얼대는 게 아닐까.
이제 자연스럽게 아무 자리에나 앉아서 술부터 시키는 저 중국집처럼,
잘 정비되고 계획된 이 신도시에서도 내가 편하게 다닐 곳들이 늘어날 것이다.
봄이 오고 코로나 제약이 조금 더 풀려서 동선이 더 자유로워지고 술자리가 늘어나면 더더욱.
이 동네에 맞는 모드를 내가 장착할 때까지,
그래서 다른 동네의 낯익은 술집에서 한잔 하고 들어온 다음날에도
어색하지 않게 산책을 할 수 있을 때까지,
그러면서 점점 내 입에서 재미가 없다는 말이 사라질 때까지,
눈길을 둘 만한 구석을 하나씩 찾아야겠다.
keyword
일상
산책
에세이
너무 다른 역할
여행 분야 크리에이터
일을 하고, 여행을 시도하고, 사진을 반복합니다.
구독자
1,696
제안하기
구독
매거진의 이전글
시차를 두고 봄은 온다
하루는 밝고 하루는 흐리다
매거진의 다음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