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곳은 쾨쾨하고 낡고 더럽고 먼지 나고 그리고
그 후
먼 곳을 가깝게 만든다고 들었다
-시 '청지기' 中, 김복희 시집 「내가 사랑하는 나의 새 인간」
어느 오전, 재활용품을 버리려 나가려다 멈춘다.
오랜만에 젖힌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볕이 가득이다.
한참을 눈에 담는다.
볕을 받은 잠옷이 따뜻해진다, 봄볕만이 할 수 있는 속도로.
쥐 죽은 듯 있었는데, 모든 창을 닫아걸고 있었는데,
벌써 왔다. 봄은, 시차를 두고.
네 개의 화분을 다용도실 창가로 옮긴다.
이사를 오고 난 후 방과 거실의 음습을 견디던 것들이다.
겨울을 지나며 녹색은 많이 옅어졌지만, 새싹을 내보내는 걸 잊지 않았다.
오랜만에 볕 아래 놓인 화분에서 기분 좋은 미열이 난다.
봄은 늘, 늦게 알아차리게 된다.
하지만, 내가 발견하는 봄과, 이미 와 있는 봄의 시차는 딱 한 박자만큼이다.
"벌써 왔나?"라는 놀람이 어울리는 여름과도,
"벌써 갔나?"라는 탄식이 들어맞는 가을과도,
그리고, "아직도..?"라는 한숨이 늘어지는 겨울과도 다른 호흡이다.
한 박자 늦은 나의 봄은, 실제로 다가온 봄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한 박자 뒤에 왔다는 이유로 나의 봄은, 실제 봄의 녹색보다 조금 옅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스스로를 한번, 토닥이게 된다.
12월부터 살고 있는 새 집에는 앞에도 뒤에도 베란다가 없다.
그래서 밖과 바로 맞닿아 있는 창들마다 암막커튼을 달았다.
커튼으로 구분된 집은 늘 고요하다.
그래서 나의 '쾨쾨하고 낡고 더럽고 먼지 나고 그리고 어두운' 집에서,
겨울은 더 길게 느껴졌을 수 있다.
이번 겨울,
나는 어떤 먼 곳을 얼마나 가깝게 만들었을까?
다용도실 문에 비스듬히 기댄 채 한참을 서있는다.
시차를 두고 떠나는 겨울을 배웅하듯이,
작은 먼지들이 반짝이며 떠다닌다.
그래도 되는 겨울도 있는 법이란 걸,
겨우, 생각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