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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Apr 03. 2022

하루는 밝고 하루는 흐리다

문을 열면 어딘가 여름 어린 나무들이 있을 거야 아직 줄시계를 들고


-詩 '다크 서클' 중, 박상수 시집 「오늘 같이 있어」





생각을 비우고 걸어본 지가 오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달, 머리에 담아야 할 것도, 입 안에 준비해야 할 말들도 많았다.

종종 여유를 찾아 걸어봤지만 만족스럽지 못했다.

혼자 시끄럽다 보니, 걸음의 속도는 일정하지 않았다.


예기치 않은 낮술 약속이 잡혔을 때, 시간에 맞추지 않고 바로 나간 건 그 때문이었다.


일이 얼추 정리가 돼서 속이 무난했다.

때마침 카메라도 가방에 챙겨 왔기에 걸음에의 명분은 충분했다.



오늘이라는 하루는 밝은 날이었다.


어려서부터 냉동실 냄새를 좋아했다.

아무도 없을 때 냉동실 문을 반쯤 열고 코로 숨을 들이쉬곤 했다.

차고 습한 공기가 콧속의 점막을 살짝 얼릴 때의 아릿함이 좋았다.

냉동실에 무엇이 있던 냄새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건 맑게 언 얼음덩어리를 양손 가득 잡아 문지를 때의 상쾌함과 비슷했다.


딱히 은밀할 것도 없었지만 딱히 내보일 것도 아닌,

딱히 빼앗길 것도 아니었고 딱히 다른 사람이 탐낼 것도 아닌,

지극히 개인적인 선호로서의 냄새였다.



성격 급한 꽃나무들이 꽃잎을 틔우기 시작하는 초봄의 공기엔,

냉동실 냄새 같은 상쾌함이 아직 남아있었다.

주위에 사람이 없을 때 간간이 마스크를 내리고 깊은숨을 들이쉬면,

밝고 명확한 냄새가 폐 속으로 들어왔다.



종종걸음의 직장인들이 갑자기 사라진, 오후 1시의 골목은 한가로웠다.

자주 멈추고 정직하게 사진을 찍었다.


나에게 할 질문도, 다른 누군가에게 할 질문도 떠오르지 않았다.

눈에 담기는 걸 보고 눈에 담기지 않는 건 지나쳤다.

밝은 날이었기에, 판단도 공기의 냄새처럼 명확했다.



방향을 못 잡고 살고 있나, 하는 의심이 자주 든다.

나이 탓도, 계절 탓도 할 수 없어서 의심은 반복되기만 한다.


자기 계발 류의 최면이나, 설득력이 뛰어난 문구(文句)의 힘을 빌어보지만 큰 소용은 없었다.

의심은 걱정을 낳고, 걱정은 불면으로 이어졌다.

불면의 밤을 지나 맞이한 하루엔 조금씩 각도가 어긋난 선이 몇 개씩 발견됐다.


누군가는 농구를 배워보라고 했고, 누군가는 산을 타보라고 했고,

누군가는 골프를 배워보라고 했지만, 딱히 내키지 않는다.

농구와 산과 골프에서 쉴 틈을 찾은 그들을 축하해줄 뿐이다.

 

내가 연애를 하지 않아서라는 단순한 분석을 내놓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런 이유로 연애를 하는 건 상황을 더 복잡하게 만들 뿐이다.



......라는 생각을 하면서 걸었다.


내 또래의 남자 직장인들이 중학생처럼 수다를 떨며 지나간다.

점심을 먹으러 나왔다가 들어가는 길일 것이다.

큰 목소리와 작은 체구를 가진 남자가 주로 말을 하고,

누가 건들기만 해도 고개를 끄덕일 듯한 몇 사람이 대꾸를 한다.

짧게 짧게 이어지는 웃음이 연두색으로 떠올랐다 흩어진다.


듣기 좋은 풍경이었다.



"호의적 우연"이라는 표현을 얼마 전에 보고 적어놨다. 내내 기분이 좋은 표현이다.


필연은 너무 부담스럽고 우연은 너무 가벼웠는데,  

호의적, 이라고 붙이니 둘 사이의 어느 지점이 돼 버렸다.

나의 이끌림에 따라 시작하거나 시작하지 않을 수 있는 인연,

나의 결정에 따라 유지할 수도 끊을 수도 있는 관계.

 

나의 호의는 누군가를 대상으로 하지만, 전적으로 나의 취향이므로,

호의적 우연에 의한 만남은 편안할 수 있다.



...... 이런 생각을 하며 걸었다.


아직 봄의 것들로 붐비는 계절이 아니었기에,

작은 짐을 실은 오토바이나, 왠지 경쾌한 걸음의 누군가가 지나가도 골목은 조용하다.


고요하고 밝은 풍경 안을,

생각을 비우려는 의지를 농담처럼 지닌 채 걸어간다.



하루가 밝으면 하루는 흐릴 것이다.

흐린 날엔 흐린 날의 생각이 이어질 것이다.



아직 봉오리가 채 피지 않은 목련나무를 보면서

두 사람이 좋아하며 사진을 찍는다.


그녀들의 호의로, 목련의 봄은 이미 시작됐다.



생각보다 일을 일찍 마쳤다는 누군가의 연락이 온다.

한 시간 뒤쯤 만나려 했던 약속이 당겨진다.


밝은 날은 아직 길게 남아있기에,

몇 개의 호의가 겹친 오늘의 술자리도 부담스럽지 않기에,

지체할 것 없이 카메라를 챙기고 버스 정류장으로 향한다.


방금까지 걸었던 풍경의 끝에 있는 문을 열고 나와,

덤으로 얻은 다른 하루로 들어가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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