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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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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다른 역할
Apr 11. 2022
소규모 동네 봄놀이
자석을 감추면서
공백을 가지고 다니는 일이지
-詩 '그 모든 비행기들' 중, 유이우 시집 「내가 정말이라면」
행락객(行樂客), 이란 말을 좋아한다. 순전히 즐기기 위해서 나온 사람.
충동적으로 떠나 본 기억이 오래됐다. 코로나 탓을 하지만, 달리 탓할 곳도 많다는 걸 안다.
그중의 하나가 나 자신이라는 것도. 핑계를 만들어가며 침잠하는 때가 많았다.
오전 일찍 마트가 문 여는 시간에 맞춰 가서 럼주와 와인, 비누
를
샀다
.
그리고 차를 타고 집으로 오는 길, 멀리서 집 쪽을 보니 천변에 온통 만개한 벚꽃이었다.
12월에 이사 온 이 동네에서 처음 맞는 봄이다. 지난주까지 그냥 하나의 나무라고 생각한 것들이,
죄다 벚나무였다.
주차를 하고 카메라를 챙긴다.
이런 봄날은 순전히 즐겨도 되기에, 후줄근한 동네 주민 복장의 행락객이 되기로 한다.
봄은 밀도가 낮다.
갓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잎들의 녹색은 반투명하고,
눈치 보지 않고 펴버린 벚꽃잎들의 하얀색은 가볍다.
그래서,
사납지 않은 햇볕 아래를 걷다가도,
자그마한 계기라도 있으면 두둥실 떠서 어딘가로 떠날 수 있을 듯한 기분이 든다.
내 몸의 무게나 내 걸음의 게으름 따윈 금세 잊게 되는 낮은 밀도의 계절.
그래서,
봄 산책은 뜻하지 않게 시작되고, 봄놀이는 별다른 음(音) 없이도 이어진다.
가볍게 흐르듯이, 혹은 방향 없이.
사진을 찍는 내 옆으로 한 가족이 지나간다.
앞서 간 중년 부부의 대화는 즐거웠고,
할머니의 말투는 친절했으며, 손녀의 웃음은 과장되지 않았다.
천변길로 내려간 가족이 유턴해서 다시 카메라 앞을 지나간다.
손녀가 든 양산은 할머니 쪽으로 기울었고,
할머니는 양산을 든 손녀의 팔을 꼭 잡고 있다.
봄은 꽃잎의 형태로 그들을 통과한다.
아이들은 물어보고 부모는 대답한다.
부모는 길을 잡고 아이들은 따라간다.
자전거가 지나가며 일으키는 바람에, 낮은 곳에 달린 꽃잎이 흔들린다.
아직,
떨어지지는 않는다.
꽃잎이 가득한 나무 아래를 어슬렁대니,
내가 가지고 있는 자질구레한 질문과 고민들이 공백이 되는 기분이다.
그 공백 안으로 하얀 봄이, 들어온다.
길을 따라 계속 가볼까 하다가 그만두고, 다리를 건넌다.
오늘은 다리 건너 맞은편 길까지 즐기고, 'ㅁ'자 경로로 집에 가기로 한다.
다리 너머로 이어진 길은 다음 주를 위해 남겨둔다.
아침 출근길과 저녁 혹은 술에 취한 밤 벚꽃길을,
어느 쪽으로 택해 걸을지는 굳이 생각하지 않는다.
나무 아래를 지날 땐 몰랐는데, 다리 위에서 본 벚꽃나무들은 어리다.
이 신도시가 조성된 지 몇 년 되지 않으니, 그즈음에 심은 나무들일 것이다.
주변으로 거칠 것이 없어 모든 나무가 온전히 햇볕을 받고 있다.
이 동네에 얼마나 살지 모르지만,
그리고 나무의 생장을 매일 혹은 매년 내가 알아챌 리도 만무하지만,
나무들은 정직한 속도로 커가고, 봄의 벚꽃잎들은 성실하게 풍성해질 것이다.
얼마 전 술자리에 누군가가
"그렇다면, 그럴 수 있지."
라고 말했다.
어느 맥락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가볍디 가벼운 긍정에 마음이 탁 놓였던 건 확실히 기억한다.
그게 무엇이건 누구이건 간에, '그렇다면'이라고 인정하면 모든 게 이해가 된다.
단순한 수긍에서 오는 오류를 무시할 순 없지만,
가끔은 뭔가를 보는 기준을 확 낮출 때가 필요하다.
오늘처럼 봄날 벚꽃 사이로 티 없는 풍경을 보게 되는 때같이.
길을 지나는 사람들의 얼굴에, 왠지 모든 걸 용인할 듯한 너그러움이 가득하다.
잠시 다리 쉼을 한 포메라니안과 남자가 다시 길을 간다.
복스럽게 부푼 털이 살랑대는 풍경을 한참 서서 바라본다.
소규모로 봄놀이를 하는 동네의 길에서,
대체할 수 없는 봄날의 하루가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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