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몇 마디 말을 배웠다. 베두인족들과 사흘 동안 함께라면 반드시 알아 두어야 할 단어들이었다.
불, 물, 빵, 신(神), 소금.
-에세이집「지중해 기행」中, 니코스 카잔차키스
신도시로 이사 온 지 5개월이 된 어느 날, 뭔가 '신도시 주민이라면 응당 가지고 있어야 할 무엇'이 없다는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정말 말 그대로 '느낌'이었다.
그게 뭐지?
집안을 찬찬히 검사(?)했다. 가전제품도 아니고 가구도 아니고. 쟁여두어야 할 술도 아니고...... 강아지? 고양이? 아니면 아프리카 원산지 희귀종 식물이라도 키워야 하나?얼마 후 생각 없이 당근마켓을 보다가 수없이 올라오는 이것 판매글을 보며 그제야 답을 알았다.
신도시 주민에겐 자전거가 있어야 한다.
실질적인 이유를 찾자면 있긴 했다.
지하철역까지의 애매한 거리(걸어서 12분)와 풍경(휑뎅그렁한 직선도로와 모델하우스가 이어진)도 그렇고, 5분 거리 출퇴근 길을 자동차로 하며 느낀 불편함(술을 마시고 차를 못 갖고 가면 어차피 다음날 걸어가거나 버스를 타야 하는)도 그렇다.
하지만 이런 이유를 넘어서 왠지 신도시의 풍경엔 자전거가 있어야 한다는 '당위적인 느낌'이 들었다.
그건 뭐랄까, 드러내야 하는 메타포, 같은 거였다.
하지만, 이미 전에살던 동네에서도 자전거를 사고 반년 정도 타다가 마당에 14년을 방치했던 전력이 있기에, 충동적으로 접근하지는 않기로 했다. (나는 그만큼 성숙한 것일까, 겁이 많아진 걸까? 여하튼) 새 자전거를 사기보다는 중고 자전거를 골라보기로 했다.
그런 이유로 수많은 자전거 판매글이 올라오는 당근마켓을 관람(?)했다.
정말이지 다양한 자전거가 매물로 올라왔다. 486만 원짜리 로드 자전거부터, 3만 원짜리 동네 마실용 자전거까지 종류와 가격이 천차만별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판매글엔 '잘 안 타게 돼서 세워놓기만 했다'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어쩌면 자전거는 누구든 쉽게 유혹하고 누구든 쉽게 싫증 내는 묘한 성격의 물건이다.)
그렇게 며칠 후, 초록색 안장이 인상적인 접이식 자전거가 눈에 들어왔다.
만약에 차를 끌고 회사를 갔다가 술을 먹어서 차를 두고 온 다음날에 자전거를 타고 간다면, 퇴근길에 그걸 접어서 트렁크에 싣고 오면 되겠다, 싶어서 접이식 자전거를 택한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본격적인' 느낌은 피하고 싶었다. 나는 스판 의상에 전문적인 허벅지 근육을 자랑할 여력이 안 되는 동네 라이더 정도가 될 게 뻔했다. 자전거 타기를 본격적인 취미로 시작한다기보다는 앞에서 말한 대로 신도시민이라면 응당 가져야 할 무엇,으로 접근하는 사람에게는 근거리용의 작은 자전거가 더 어울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쌌다.
10만 원. 이 정도면 반년을 타다가 14년을 처박아놔도 크게 아깝지는 않을 금액이었다.
하지만, 그러니까, 굳이, 난 2만 원을 깎은 가격을 상대방에게 제안했다.
(솔직히 말은 주저리주저리 했지만 굳이 자전거를 사야 하나?라는 생각이 조금 남아있기도 했고, 무엇보다 자전거 판매글을 구경하는 재미를 조금 더 누리고 싶었다. 여하튼,)
구석구석 찍어놓은 자전거 사진과 군더더기 없고 정중한 말투의 판매글을 보니, 왠지 남자아이 둘을 키우는 가장이 무심코 시작했던 자신의 취미생활을 접는 듯한 느낌이었기에 내 또래의 남자이지 싶었다. 특히 '접이식이라 자동차에 편하게 실을 수 있어요'라는 표현에서 내 또래 혹은 아래위 10살 정도라고 확신했다.
그 말인즉슨, 그렇게 정리해서 손에 쥘 돈이 10만 원이든, 8만 원이든 별 차이가 없을 듯했다는 말이다. 하지만 바로 올 줄 알았던 답변은 이틀이 지나서야 왔다.
"오늘 안에 구매하신다는 조건이면 8만 원에 드릴게요."
차로 12분 거리의 아파트 단지에 주차를 하고 조금 기다리니, 멀리서 자전거를 끌고 오는 게 보였다. 내 예상과 다르게 앳돼 보이는(아마 본인은 인정하지 않겠지만) 남자애였다. 많이 봐야 중학교 3학년 정도? 평범한 안경에 평범한 운동복을 입은 친구는 나한테 고개로 살짝 인사를 하고 다가왔다.
내 또래의 남자를 상상했던 나는, 당황을 했다기보다는 좀 신기한 표정으로 그 아이를 쳐다봤을 것이다. 요 몇 년, 아니 거의 20년 내외의 내 일상에서 중딩과 뭔가를 같이 하거나 심지어 대화를 한 일은 없었다. 어쩌면 마지막 중딩의 기억은 대학 때 농활 가서 만났던 청소년부 아이들 정도였을까 싶었다. (이 모든 생각이, 그 애가 자전거를 끌고 다가오는 짧은 순간에 떠올랐다.) 다시 여하튼,
중딩 친구는 툭 하니 자전거를 넘겨주었고 나도 툭 하니 핸들을 잡았다. 핸들의 단단한 느낌이 좋았다. 판매글에 '앞뒤 타이어 공기압 빵빵하고 체인에 기름칠되어있습니다!'라고 쓰여있던 게 생각나서 쓱 보니, 글 그대로였다.
자전거라는 게 바퀴만 잘 달려있으면 됐지, 싶어서 별다르게 여기저기 살펴보지 않고 바로 계좌이체를 했다. 그리고 트렁크 쪽으로 끌고 가려는데 그 아이가 툭 한 마디 던졌다.
"저기, 접는 법 알려드릴까요?"
유달리 친절하다거나 혹은 정반대로 사춘기 특유의 뾰로통한 말투가 아니었다. 그 중간 지점 어디에 있는, 적당히 건조하고 거리를 두는 말투였다. 그런데 그 말을 건넨 중딩 친구의 얼굴을 보니 '알려주고 싶어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었다.
내 눈앞의 아저씨는 접이식 자전거를 접는 법을 모를 거야, 라는 생각에서라기보다는, 방금 전까지 자기 꺼였던 자전거에 대한 애정에서 나온 친절함이었겠다. 얼핏 봐도 잘 관리한 자전거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엔 자부심이 엿보였다.
원래는 중딩 친구를 보내고대충 이리저리 만져보고 접을 예정이었다. (14년 동안 방치했었던) 예전의 자전거도 접이식이어서, 대충 구조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수십 년 만에 대화한 중딩의 자부심 어린 제안을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난 1초도 안 되는 시간에, 접이식 자전거라고는 생전 처음 보는 아저씨 모드로 전환해 "아이고, 안 그래도 물어볼까 말까 했었는데 알려주면 고맙죠."라고 웃으며 말했다.
아이는 접이 부위의 이중 잠금을 푸는 걸 직접 보여주었고, 핸들 쪽 레버에 대해서도 말해주었다. 그리고는 "잘 탈게요."라는 내 말에, "네"라고 간결하게 대답했다.
여전히 얼굴엔 '뭔가를 더 알려주고 싶은 표정'이 떠 있었다.
그 나이의 나는 그런 말을 차마 하지 못하고 쭈뼛대다 말았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는 그 나이의 나보다 용감한 친구였다. 그의 친절함은 자신의 물건을 건네받는 나에 대한 호의(상대가 굳이 내가 아니어도 당연히 보였을)에서 나왔을 것이다.
중딩 친구가 이걸 팔고 돈을 보태 더 큰 자전거를 살지, 아니면 자전거 생활을 마감할지는 알지 못했다. 나는 당근마켓 거래에서 만난 사람에게 그런 걸 물어볼 정도로 프렌들리 한 사람은 아닌 데다가, 아이 역시 쿨함이 온몸에서 흐르는 친구였으니까.
차에 싣기 위해 자전거를 접으면서 "중딩이었으면 괜히 깎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 싣고 깎았던 2만 원을 쿨하게 현금으로 줄까 하고 고개를 들었는데, 나보다 더 쿨한 중딩은 저 멀리 휘적휘적 걸어가고 있었다. 뒷모습만 봐서는 8만 원으로 피시방을 가서 놀려는 생각에 들뜬 건지, 엄마한테 공부에 열중하기 위해 자전거를 팔았다고 자랑하려는 생각이 가득한 건지 알 수는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꽤 후련해 보였다는 점과 절대 아쉬워보이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어쩌면 그 친구에게 자전거란 쉽게 유혹당했지만 꽤 오래 싫증 내지 않았던 무엇,이었던 동시에, 자신의 소임을 다해 시선을 거두어도 되는 무엇, 정도가 아니었을까.
집에 돌아와 자전거를 집 안으로 들고 들어와 닦았다. 전체적으로 깨끗했지만 구석구석 때는 묻어 있었다. 다 닦고 내 키에 맞게 안장과 핸들의 높이를 조정했다.
내가 이 자전거를 몇 달을 탈지 몇 년을 탈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왠지 단순히 싫증이 나서 이 자전거를 방치해두지는 않을 성싶다. 왠지 그냥 그런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