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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Aug 03. 2022

넌 옷이...원마일룩보다 더하네

끄덕이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소설 「옆에 앉아서 좀 울어도 돼요?」중, 구효서





"너는 옷이 뭐...원마일룩보다 더하네."


오랜만에 만난 고등학교 친구가 내 옷차림을 일견하고 말했다.

원마일룩((1 mile look)이 뭐냐고 되묻는 나에게, 1마일(1.6km) 정도 가까운 거리 나갈 때 그러니까 동네 마실 정도 할 때 입는 편안한 옷이라고 설명했다.


우리는 종로 3가 먹거리 골목에서 만난 참이었고, 내가 사는 곳은 1마일보다는 훨~씬 먼 고양시였으니,

친구의 멘트는 '동네 편의점 가는 차림으로 이렇게 멀리 온 거냐' 정도의 놀림,

혹은 '여전히 그런 옷을 입고 다니는 거냐' 정도의 현실 긍정의 의미였을 거다.

뭐, 받아들이는 내 입장에서 둘 중 어떤 의미도 상관없었다.

우리는 오랜만에 만난 거였고, 여름휴가철의 낮술 자리였고, 앞에 둔 물쫄갈비는 맛있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지나치게 편한 차림'으로 다니는 걸 친구들은 지나치게 많이 봐왔다.

(솔직히 나를 제외한 나머지 3명의 옷차림도 그렇게 꾸민 것 같진 않았지만, 굳이 그 말은 하지 않았다)


살찐 걸 감추기 위해 오버사이즈로 산 티셔츠에,  

8년 전에 출장지에서 산 후줄근한 반바지를 입

나는 기분 좋게 소맥을 말고 안주를 비웠다.

말 그대로, 원마일룩 같은 낮술이었다.



원마일룩이라는 단어를 들으면서 하나 건졌다고 생각했다.  

뭐랄까, 규정이 확실한 이 단어로 인해, 일종의 면죄부를 받은 느낌이었달까.  


편하디 편한 집 앞 패션을 보고 누군가가 그 단어를 생각해낸 것이고,

그런 패션을 한 사람이 많으니까 흘러 흘러 내 귀에까지 들어왔을 것이다.  

그리고 이 단어를 접한 나는, 나 같은 행동을 하는 사람이 나 말고도 있구나, 하는 위안을 얻는다.


굳이 옷차림에 관한 게 아니더라도, "내가 이래도 되나" 혼란스러울 때가 종종 있다.

솔직히 말하면 나이가 많아질수록 그런 경우가 더 많아지는 듯하다.


누군가의 팀원, 누군가의 조력자였을 때는

자연스럽게 전가할 수 있었던 '결정의 부담감'과 '결과에 대한 책임'같은 것들이,

폭서기의 햇볕처럼 거칠 것 없이 내 온몸에 내리쬔다.

피할 곳도, 움직일 수도 없는 상황이 많아진 느낌.  

상의할 사람은 있지만 정작 진지하게 상의는 되지 않는 상황이 반복되고,

스스로에 대한 의심은 출구 없이 자전하면서 몸집을 키워나간다.


그래서 원마일룩 같은 단어를 만나면, 나 같은 사람이 또 있다는 것에 안심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안심은,

눈치 안 보고 갈팡질팡해도 되는구나,

다들 인생은 혼란스러운 거구나,

자기 자신을 의심하는 게 당연하구나, 하는 안도감으로 이어진다. 



MBTI도 비슷한 역할을 한다. 한창 유행할 때는 이런 게 있나 보다 하고 넘겼는데,

요즘 MBTI 성향별 성격이나 행동양태를 분석해놓은 게시글들을 보며 공감하고 위안을 받는다.


아. 나 같은 사람이 나 말고도 많구나.


내 MBTI인 INFJ 성향에 대한 글들을 보면, 딱 내 얘기를 적어놓은 것 같다.

내적으로 침전하며 고민하고,

피동적인 소통을 하며 누군가의 반응에 끊임없이 신경 쓰고,

여러 개의 사회적 가면을 구비해두고 만나는 사람에 맞춰서 갈아 끼고

카톡 하나를 보낼 때 수없이 쓰고 지웠다가 맞춤법까지 신경 쓰고,

이성을 만날 때는 여러 단계의 문을 열었다 닫는 타입.

일어나지 않을 변수까지 계획단계에서 걱정을 하고

일이 조금 어그러졌을 때 외부 요인보다 스스로에 대한 질책이 강한 그런 성향.



어쩌면 나는,

원마일룩이나 MBTI 같은 규정 속에 스스로를 욱여넣고 싶은 게 아닐까.

그렇게라도 세상의 어느 지점과 내가 연결되었다는 걸 확인하고 싶은 게 아닐까.


친구들의 성향에 좌우되는 학창 시절을 지나고,

(그 시기의 우리는 동류(同流)라는 것이 말투와 패션까지 비슷해지는 것으로 착각했고)

누군가의 회유와 윽박에 행동양식을 교정하는 사회생활 초년도 지난 지금,

(그 시기의 우리는 나를 교정해서 기존 조직에 젖어드는 게 최선이라고 오판했고)


나는 나의 성향이나 행동방식이 바뀌지 않을 걸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이건, 나는 나야, 식의 치기 어린 고집 때문이라기보다는

내가 이런 걸 뭐 어쩌겠어, 식의 힘을 뺀 게으름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와 마주하게 된, 이제껏 크게 바뀌지 않았고 앞으로 바뀌지 않을 나 자신은,

뭐랄까 대견스럽긴 한데 좀 위태롭다.

결국 곁눈질로 누구를 복제하면서 얻을 안도감도 포기하고,

조직적인 분위기를 따라갔을 때 얻는 보상도 포기한 상태니까.


그렇기에, 원마일룩이나 MBTI 같은 규정들을 반가워하며, 스스로를 대입하게 된다.

나와 비슷한 누군가들의 존재에 안도하고,

그들 또한 무탈하게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만족해하며,

나의 위태로움을 누그러뜨린다.



하지만 딱 그 정도다.


누군가가 만들고 퍼트리는지 모르는 이런 규정들에 맞춰가는 건 영 내 취향이 아니다.

대충 입은 옷으로 꽤 긴 거리의 술자리를 오가는 나의 패션 성향은,

원마일룩이라는 단어와 별개로 그대로일 것이고,

내향적이고 생각이 쓸데없이 많은 나의 성향은,

INFJ라는 규정과 별개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유지될 것이다.


잠깐, 안도할 정도면 된다.

집안에서 혼자 잘 놀다가 문득 커튼을 열고 바깥 날씨를 살피는 정도의 잠깐.

그렇게 얻은 위안으로, 나의 소규모 일상은 불편하지 않게 유지될 것이다.

나의 성향에 대해 누군가가 끄덕이거나 끄덕이지 않아도 이유를 묻지 않고,

그 이유를 묻지 않는 것에 대해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 그런 방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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