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의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와 2002년의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가 묘하게 연결돼 있음을.
'나의 해방일지'에서 삼 남매의 동네 친구로 등장하는 전혜진은,
'네 멋대로 해라'에서 미래(공효진)의 여동생이었다.
그때 극 중의 그녀는 여중생이었고, 지금 극 중의 그녀는 자유로운 연애관을 설파하는 성인이다.
어쩌면, 작가는 그녀를 하나의 매개로 두 드라마의 세계를 연결하고 은근히 티 내고 싶었는지 모른다.
여중생에서 성인으로 성장한 그녀의 시간만큼 두 드라마 사이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20년 전의 '네멋'의 세계와 지금 '해방일지' 세계는 왠지 하나처럼 보인다.
1) 아무도 이해 못 하는 세상에 살던 나를 이해해주는 너
"안을 뻔했네. 반가워서."
편의점 앞에서 만난 남자 친구 구씨에게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말하는 염미정(김지원)의 모습은,
혼잣말인 듯 아닌 듯, 문어체인 듯 아닌 듯 대사를 던지던 네멋의 전경(이나영)과 닮아있다.
전경이 고복수(양동근)가 소매치기인 걸 알고 자신의 감정을 접으려다 결국은 포기하고 다시 만난 버스정류장에서 그녀는 45도쯤 땅을 쳐다보며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말한다.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네."
마치 세상이 곧 망해도 난 내 갈 길 갈 거야, 같은 식의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들은,
평소에는 말을 얼버무리고 눈에 띄지 않게 행동하지만, 자신이 선택한 사람 앞에선 달라진다.
그녀들의 말에는 마침표가 생기고, 얼굴엔 가벼운 흥분이 돈다.
누군가와 같이하고 싶다, 는 단순한 욕망을 확인한 두 주인공 염미정과 전경은,
자신의 끌림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
아무도 이해 못 하는 세상에 살던 나를 이해해주는 너.
굳이 드라마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누군가의 눈을 들여다보고 누군가의 손을 잡는 이유는, 그거 하나뿐이 아닐까.
2) 세상의 떨거지라도...
두 드라마가 여타의 다른 드라마와 다르게 느껴지는 건, 남자 주인공들의 '의아한 조건'에도 있다.
'해방일지'의 구씨(서상구)는 알코올 중독자에, 시골 싱크대 업체의 직원이다. 그가 어떤 과거를 숨기고 있었는지는 앞으로 나오겠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방송된 내용에서 그는 그 정도의 조건을 가지고 있다.
객관적으로 염미정은 구씨보다는 나은 직업(카드회사의 디자인 직원)을 가졌지만 그녀에게 그런 조건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녀는 그에 대해 불필요하게 지레짐작하거나, 그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폄훼하지 않는다. 그녀가 하는 거라곤 평소보다 조금 더 커진 목소리로 솔직히 말하는 것뿐이다. 마음을 닫고 살던 구씨는 결국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오해해도 돼요. 나는 전경 씨한텐 뭐 아직도 소매치기, 떨거지로 보이니까 차라리 다행입니다.
뭐, 어차피 아직도 나는 세상의 떨거지입니다."
'네멋'의 고복수(양동근)는 전직 소매치기이자 스턴트맨이다.
형을 살고 나온 그에게 소매치기 세계의 그늘은 쉽게 걷히지 않지만, 그는 과거의 세계를 버리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전경은 그의 과거에 대해 혼란스러워하고 부인하려고도 하지만 결국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게 되고, 그의 노력을 응원한다.
일반 사람들에게 남자 친구의 조건으로서는 의아할 고복수의 객관적 조건(소매치기 전과자)은, 전경에게 아무런 기준도 되지 못한다. 그녀에게 중요한 건 험하게 살았던 고복수 혼자만의 과거가 아니라, 자신과 함께 지켜나갈 고복수의 현재이다.
3) 점점 진해지는
'해방일지'의 주인공들은 착하고만 싶고 조용히 살고만 싶다.
과거를 감추고 이름조차 말하지 않고 조용히 풍경과 술에 의지해 살고 싶은 구씨와,
상사와 동료들, 심지어 사내 복지센터 담당자의 종용에도 조용히 집과 회사를 오가며 사는 염미정은 닮았다.
최대한 자신을 드러내지 않도록.
최대한 자신의 조그맣고 안전한 세계가 침범당하지 않도록.
각자의 소행성에 살던 이들이 바뀌는 건, 사랑을 시작하고나서부터다.
염미정의 목소리와 어투는 점점 강해진다.
그녀의 바뀐 표정과 적극성에 동료 직원들이 놀랄 정도로.
그녀는 자신의 애인인 구씨 앞에서 더더욱 과감해진다.
염미정은 자신의 언어로 말하고 자신의 감정으로 행동한다.
구씨 역시 폐인처럼 살던 모습에서 조금씩 바뀐다.
그가 빈 소주병을 버리고 집을 청소할 때 우리는 희미한 그림자 같던 그의 모습이 점점 '진해짐'을 느낀다.
그건 아예 제로에 가까웠던 그의 얼굴 표정이 조금씩 다채로워짐을 볼 때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둘은 무리하지 않는다.
둘이 하루씩 하나씩 만들어가는 연애의 일지는 그래서 일관성이 있다.
그들의 연애는, 그러니까 폭발적이거나 찬란하다기보다는
몇 광년 떨어진 곳의 심지 끝에 붙은 불을 이제야 알아챈 듯,
조용히 시작해 절대 꺼지지 않을 것을 확신한 듯 평범하게 이어진다.
역전 돈가스집에서, 마을 버스정류장에서 시작하는 풀숲 길에서.
'네멋'의 전경과 고복수도 그랬다.
감옥에서 나온 후 소매치기로서의 과거를 바로잡으며 살려했던 고복수와,
우물우물 말도 잘하지 못하고 엔간하면 헤실헤실 웃기만 하던 전경.
둘은 남들이 볼 때 하찮아 보이는 자신의 세상을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
최대한 조용하고 예의 있는 방식으로.
그리고 서로를 만나고 서로를 자신의 세상에 조금씩 들이면서 둘은 변한다.
그건 자기가 갖고 있던 작은 세상의 경계선을 무너뜨리는 방식이 아니라
세상의 윤곽선을 더하는 방식이다.
전경과 고복수에겐, 온전하게 자신을 이해해주는 연인이 있기에 자신의 경계를 지울 필요가 없다.
새로 시작한 두 사람의 세상의 윤곽선을 하나씩 그릴 뿐이다.
빵과 우유를 들고 탄 시내버스의 뒷자리에서, 계획 없이 헤매던 포항의 낡은 동네에서.
4) 평범한 이들의, 별 볼 일 없는 로맨스
2002년 내가 왜 '네 멋대로 해라'에 빠져있었나를 한참 지난 후에 생각해봤다.
자신을 둘러싼 세상 속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에 나 자신을 투영했을 수도 있고,
그 위태롭고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서로를 발견하고 의지했던 두 사람의 관계를 부러워해서였을 수도 있다.
2022년 현재 '나의 해방일지'를 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전경과 염미정, 고복수와 구씨를 다시 떠올리니,
결국은 이들이 특별해 보이는 건 이들의 평범함 때문이지 싶다.
일 년이면 수십 편씩 나오는 드라마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실장님' 류의 직업이 아닌,
소위 별 볼 일 없는 직업을 가진 남자 주인공들. (싱크대 업체 직원인 구씨, 소매치기 출신 스턴트맨 고복수)
배우의 미모를 무시한 설정이라고 비판받고는 있지만, 화려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스타일의 여자 주인공 들. (무채색이나 옅은 파스텔톤의 정장과, 뭔가를 드러내기보다는 감추는 용도로 보이는 박스티와 남방을 주야장천 입는 염미정과, 극 중 아버지가 거지 같다고 말하는 찢어진 청바지에 헐렁한 히피 스타일의 셔츠를 입는 전경)
평범한 이들은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는 순간 특별해졌다.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다른 말로는, 별다른 일이 생길 것 같지 않은 이들에게,
연애라는 이름의 작은 파동이 일어나고 그게 퍼져나간다. 나 같은 평범한 시청자들은 그것에 몰입한다.
왠지 어디든 터벅터벅 대며 걸어갈 듯한 이들이 이어가는 연애는,
시청자인 우리가 몇 번쯤 거쳤던 평범한 만남과 이별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한다.
우리의 연애가 평범하기 그지없다는 이유로, 별 볼 일 없이 흘러갔다는 이유로 우리를 성장시켰다는 단순한 사실과 함께.
두 드라마의 세계가 연결돼 있다고 말하는 건, 내가 두 드라마의 세계를 애정 한다는 말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리고 아직 종영하지 않은 2022년의 '나의 해방일지'가 내가 예상하지 못한 전개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자꾸 20년의 간극을 둔 두 드라마가 같은 세계에 있다고 믿고 싶어 진다.
그건, 별 볼 일 없는 그들이 하는 별 볼 일 없는 연애에 대한 공감이자,
자신의 작은 세계를 지키면서도 누군가에게로 향하는 따뜻한 감정을 무시하지 않는 주인공들에 대한 응원일 것이다.
* 지난주 '나의 해방일지'에서,
염미정의 직장 동료이자 염기정의 썸남인 조태훈(이기우)이 중고 LP를 사는 장면이 있었다.
염기정이 대신 찾아간 LP가게에서 눈에 익은 너바나의 네버마인드 앨범이 나왔다.
전화 통화로 음질을 확인하던 조태훈이 흥얼거리는 너바나의 노래.
'고등학교 때 매일 듣고 살았다'는 그의 대사에서 나의 고등학교 시절이 떠올랐다.
아기가 수중에 떠있는 그 앨범을 나도 고등학교 때 주야장천 들었었다.
여러 명이 봉고차를 대절해 등교하던 그때, 교실에 7시에서 7시 반쯤 도착했던 나의 유일한 낙은,
교문과 운동장이 내려다보이는 3층 남자화장실 앞 창문에 기대서서, 아는 형한테 우연히 받은 너바나의 네버마인드 테이프를 듣는 거였다. 가사의 정확한 뜻도 정확한 발음도 몰랐지만, 이국의 낯선 밴드가 내는 음이 고등학교 내내 위안이 됐다. 그래서 지금도 너바나를 들으면 교복을 입고 뚱한 표정으로 등교하는 애들을 보던 그 시절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