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들은 적 없는 줄 알았지
천 년 전 내 소매에 넣어둔 말
-詩 '소매에 넣어둔 말' 중, 정영 시집 「화류」
오랫동안 좋아하는 가족사진이 있다.
사진 속 모두가 뭔가 '당연한 듯'해서 좋다.
아빠는 손에 묻은 뭔가를 떼고 있고,
엄마는 사진을 찍는 나를 무료하게 바라보고 있으며,
형은 멍하니 거리를 응시하고 있다.
나는 딱히 구도도 잡지 않고 똑딱이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을 것이다.
아빠가 큰맘 먹고 준비한 14년 전의 가족여행에서,
홍콩의 야경을 보고 내려와 가이드의 차를 기다리던 어느 육교 밑이었을 것이다.
별다른 대화나 특별한 예찬은 없었지만,
느리게 흐르는 시간에 운 좋게 올라탄 기분이었다.
당연한 여행 중에 보낸 당연한 하루.
모두, 그 시간에 그곳에 서 있는 게 자연스럽다는 듯 느껴진다.
그런 상황을 부를 말을 찾다 보니, '청춘'이란 말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청춘인 우리는 우리 밖의 어딘가에서 자신을 찾지 않는다.
할 말이 많아 끝맺지 못한 문장이 우리 안에 흘러넘치고,
우리가 바라보는 것들 모두에, 이름을 새겨 넣듯 우리의 반가움을 마구마구 묻혀놓는다.
청춘은 당연히 온 것이고, 당연히 즐기면 되는 것이기에,
우리는 잠시 무료해도 되고 잠시 엄한 데를 응시해도 된다.
어떤 쓸데없는 일을 해도 청춘은 다음날 아침이면 우리 앞에 온전하게 배달돼 있다.
무언가가 낡는다는 걸, 도무지 상상할 수 없던 시절.
우리는 밖으로 표현하고 남은 말과 감정 들을 소매에 넣어두었다.
언젠가 꺼내 보겠지, 하는 막연함으로. 혹은 그런 낭만을 가지고.
누군가에게 급하게 꺼내어 보여주고 남은 말들,
특이점이 없어서 적당히 마무리해서 보관해두었던 감정들.
정리되지 않고 밋밋한 그것들을,
요즘 종종 꺼내본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부를 말도, '청춘' 외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말 뜻 그대로, 푸릇푸릇한 시기의 우리는 샘솟는 것들을 꺼내놓기에 바쁘지만,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에는 그것들을 들여다볼 눈이 생긴다.
청춘은 미숙하고 그 이후는 원숙하다, 는 식의 억지가 아니다.
여전히 우리는 미숙하지만, 종종 멈춰 서서 우리가 늘어놨던 것들을 보고 즐거워할 여유가 생겼다.
그건 우리가 미숙함의 상태를 벗어났다기보다는,
미숙함을 오래 견디면서 요령이 생겼다는 말이다.
우리의 어설픔에 너무 휘둘리지 않고,
우리 자신과 누군가의 시선을 흐트러뜨려 상황을 무마하는 그런 요령.
하지만 그런 요령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 어설프다.
전체적으로 말은 넘치는데, 정작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할 때나 해서는 안 될 말을 할 때도 많다.
여전히 쓸데없는 짓을 하고 여전히 흔들리는 우리를 지칭할 말은, 그래서 청춘밖에 없다.
얼마 전, 온라인 커뮤니티가 늙어가는 증거, 라는 게시물을 봤다.
그중, '자신보다 아랫 세대에 대한 비난, 비판글이 자주 올라온다'는 내용과
'인생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개똥철학 글들이 올라온다'는 내용에 뜨끔했다.
입 밖으로 내뱉은 적은 많지 않지만, 속으로 혼자 그런 생각을 종종 했기에.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늘' 그랬다.
고등학교, 대학교 때건 혹은 사회초년생 때건,
어떤 그룹에도 아랫 세대에 대한 비판이나 인생의 철학을 설파하는 사람은 늘 있었다.
그러니 그건 나이 때문이라기보다는 개인 성향 때문 아닐까.
아마, 좀 더 어릴 때는 뇌에서 필터링을 덜 거친 자극적인 말들이 난무해서,
그런 말들이 묻혔을 것이다.
청춘은 언제 끝나는 것일까,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그래서 이것뿐이다.
"우리는 낡을 필요가 없고 낡지도 않기 때문에 청춘은 끝나지 않는다."
물론 청춘이란 말 뒤에 숨을 필요가 점점 없어지기에,
너무 소리 높여 주장할 필요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