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가온에게 어른들은 숫자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세상에는 어른이 너무 많다. 온통 어른 투성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그 많은 어른들을 전부 숫자에 넣었다가는 뭐가 뭔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
- 소설「개와 하모니카」中, 에쿠니 가오리
건조기를 사면서 새로 생긴 습관이 있다.
건조가 끝난 후 옷들을 챙기기 전에 먼지망을 확인한다.
망의 중앙으로 그라이데이션으로 모여있는 먼지들.
나는 브러시로 먼지를 뭉쳐 통에 모은다.
먼지를 모으기 시작한 이유는 분명치 않다.
살림 중에 뚜껑이 있는 플라스틱 통이 여분으로 남아서였을 수도 있고,
거실에 있는 쓰레기통까지 손에 먼지를 들고 가기 귀찮아서였을 수도 있다.
다만, 그것을 통에 넣은 후에 뚜껑을 다시 열어 감상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어떠한 미학적 동기가 있는 건 아닌 듯하고,
일정 기간의 먼지의 무게를 재볼까 하는 생각이 없다는 점에서,
통계적 의도가 있는 것도 아니다.
여하튼, 건조 후에 먼지를 모아 통 안에 넣는 게 하나의 행동 패턴이 됐다.
강박적이진 않지만 자연스럽고 당연한.
옷마다 먼지의 색과 농담이 다르다.
타월이 많이 섞인 세탁일 때, 먼지는 촘촘하고 낮게 깔려있고
맨투맨이나 운동복이 있을 때, 먼지는 약국에서 산 탈지면처럼 폭신폭신하고 가볍다.
표면이 잘 일어나는 색깔 옷이 있을 때
먼지 전체의 색은 그 색의 물감을 아주 조금 물에 푼 것 같았다.
그런 색은 명료하지 않아서, '먼지 색'이라고 뭉뚱그려 말해도 되겠지만,
매번 모아놓은 먼지 뭉텅이 사이에 놓으면 회차별로 색 구별이 가능했다.
나의 쾌감은 위생적인 안도감에서 왔을 것이다.
잔기침이 잦은 나로서는 한 주먹씩 축약된 먼지를 보며
그게 나의 기관지로 들어가지 않음에 뿌듯했다.
건조기가 아니었다면 먼지가 옷에 남아있다가 집안에 떠다녔을 것이다.
실상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 그런 상황을 머리에 그리며 난 안도한다.
하지만 통에 가득 모은 먼지를 보면서,
어쩌면 나는 나도 모르게 리셋 버튼을 누르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3~4일에 한 번 세탁을 하면서 난 밖에서 묻혀온 것들을 없앤다.
고깃집에서 밴 냄새도, 점심을 먹다 흘린 바지의 얼룩도,
땀이 섞인 채취와 누구 것인지도 모를 머리카락까지.
세탁기를 나와 건조기를 거친 옷들에게선 그러한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
건조기를 사기 전에, 그 과정은 불명확했다.
세탁기에서 건져낸 옷을 건조대에 널어 말리는 하루 혹은 이틀 동안,
옷은 이전의 시간과 이후의 시간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
눈에 띄는 얼룩은 보이지 않았지만,
며칠 전 술자리의 기억이나, 함께 했던 누군가의 말이 떠오르곤 했다.
어떤 류의 마침표나 맺음이 없는, 이러한 연속성이 별로라는 얘기는 아니다.
왠지 그때는 그런 느낌이었다는 것이다.
건조기의 먼지를 확인하기 시작한 후에는, 밖에서 묻혀온 증거가 남는 게 좋았다.
세탁을 할 때마다 성실하게 모이는 먼지는,
별 볼 일 없는 일을 하고 별 볼 일 없는 말을 늘어놓으면서도
나의 며칠이 무탈하게 지나갔다는 증거였고,
그것들을 한데 모으는 건, 그 며칠이 남긴 어수선함을 잠재우는 일이었다.
그렇게 이전의 흔적을 지운 옷을 입을 때마다
난 흙바닥 위에 그려진 희미한 출발선에 다시 서는 듯하다.
반복해서 돌아갈 곳이 있다는 건 꽤 좋은 기분이다.
그런 과정 없이 나의 매일매일이 쌓이기만 한다면,
그럼으로써 남겨할 것과 남기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할 여력조차 사라진다면,
나의 일상은 정말이지 '뭐가 뭔지 알 수 없게 돼버릴' 수 있으니까.
깨끗하게 세탁한 옷을 입고 집을 나설 때마다
누군가의 하루처럼 화려하거나 특별하지 않은 나의 하루가 시작되고,
새롭게 빈 그 시간에 다시 뭔가를 담을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