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
지하 2층 주차장에 차를 대고 엘리베이터까지 걸어오는 길,
20여 미터 뒤쪽에서 옆 부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린다.
나보다 차를 조금 늦게 댄 그는 누군가와 통화하며 걸어오는 듯했다.
돌아서서 인사하거나 걸음을 늦춰 기다리기에 먼 거리였기에,
바쁜 도시인 코스프레를 하기로 하고 적당히 걸어갔다.
그런데 건물로 들어가는 문을 열고 들어가서, 뒤에서 따라올 그의 시야에서 벗어나는 순간,
나는 걸음을 빨리해서 엘리베이터 쪽으로 가 버튼을 누르고 초조하게 기다렸다.
그리고는 십여 초 뒤에 온 엘리베이터에 타서 닫힘 버튼을 빠르게 눌렀다.
닫히는 문 사이로 건물 안에 들어온 그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몸을 문 옆에 숨긴 채 닫힘 버튼을 꾹 누르고 있었다.
어차피 내가 탄 엘리베이터가 아니라도 다른 엘리베이터는 금방 올 것이고,
그 사람은 내가 닫힘 버튼을 길게 누르고 있다는 걸 모를 것이다.
아마도, 그걸 알더라도 뭐 그럴 수 있지, 하고 넘어가거나.
그러니, 나의 행동은 불필요하게 매몰찬 행동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고작 인사 한 번과 엘리베이터가 사무실에 도착하는 짧은 시간의 대화 정도면 될 텐데,
닫힘 버튼을 누르며 문이 닫히기를 기다리던 나의 초조함은 어디에서 온 걸까.
그건 어쩌면 내가 그 사람과의 관계를 딱 그 정도로 정해놓아서가 아닐까.
내향적 인간으로 살아가는 건, 늘 관계에 대해 생각한다는 말이다.
처음 만나는 사람과의 관계를 어떻게 틀 것인가를 고민하고
(그게 공적이냐 사적이냐 따라 써야 하는 가면의 종류가 달라지고)
이미 알고 있는 사람과의 관계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를 생각한다.
더 나아가, 아예 관계의 수(數)를 과연 늘려야 할까, 가 화두가 되면서,
지구상에서 나 하나 정도는 인간관계에 목매지 않아도 되지 않나, 하면서 축소지향적 충동에 휩싸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요즈음의 나는 예전에 비해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을 덜 하는 편이다.
인간관계를 강박적으로 늘려야 한다는 생각은 아예 없어졌고,
이미 알고 있거나 어쩔 수 없이 새로 만나야 할 사람과는,
어디까지가 나이스한 관계인지를 마음속으로 정해놓는다.
예를 들면, 농담의 세기를 1~10 정도로 구분한다면 어디까지 가능한지
1~10까지의 고민 중 이 사람에겐 어느 정도까지 털어놓을 수 있는지 같은 기준을 두고
그 관계를 판단하고 그에 따라 행동한다.
일종의, 관계확정형 인간이 되었달까.
관계의 종류 혹은 질(質)에 대한 판단이 쉬워졌다는 건,
내가 과감해졌다는 뜻이 아니다. 예전보다 데이터가 쌓였다는 얘기다.
내향적인 성격 때문에 웬만하면 내가 한 수 접는 게 편했었는데, 요즈음은 그런 배려는 하지 않는다.
내가 가까이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데면데면한 예의보다는 관심을 더 보이고,
멀리 하고 싶은 타입의 사람에게는 웃으면서 선을 긋고 최소한의 예의로 대한다.
그 중간에 있는 어떤 종류의 사람들에게는 대화의 게이지를 조절하면서 여지를 둔다.
그러니까, 나는 인간관계를 고민하면서,
포기해도 되는 건 없지 않나, 에서,
포기해도 되는 걸 어떻게 판단하지, 를 거쳐
포기해도 되는 건 포기해도 된다, 에 머물렀다가,
포기해도 되는 건 포기하는 게 낫다, 로 귀착한 셈이다.
내 뒤에 오던 사람이 탄 엘리베이터는 금방 도착했고,
아침 출근길의 짧은 고민이 무색할 정도로 둘은 평범하게 업무를 시작했다.
관계는 훼손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