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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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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다른 역할
Nov 07. 2024
성실한 참석러
"난 늘 성실한 참석러였던 거 같아. 도대체 왜 그랬을까?"
잡혀있는 약속이 귀찮아진 내가 투정하자,
"그냥 한가한 사람이었던 게 아닐까?"
아내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늘 그랬다.
회사의 특강이건, 사적인 술자리건,
소규모 식사 자리건, 대규모 회식 자리건,
나는 참석을 권유받은 자리에 웬만하면 참석했다.
심지어 정해진 시간보다 조금 빠르게.
그러다 보니, 늦게 오는 사람은 늘 늦는 자리들에서
난 성격 급하게 먼저 와서 기다리는 사람이었고,
세월이 지나면서, 꽤 한가한 일상을 보내는 사람이 됐다.
(뭐 남들보다 꽤 한가한 건 사실이지만, 막상 한가한 사람이라는 이미지는 불필요하니까,
단순히 성실하게 약속시간에 맞춰 참석한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된 건 좀 억울하다.)
언젠가부터, 나의 성실함이 싫어졌다.
결과적으로 내가 약속 장소에 먼저 도착한 후에 다른 사람이 올 때까지 느끼는 그 감정이
예전에는 안도감이라면
요즈음엔 지루함으로이 바꼈다.
약속의 경중을 누군가와 비교할 필요는 없지만, 왜 나만 이 약속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라는 생각이 들고,
반대로 그걸 가볍게 생각하는 상대방에 대한 실망이 생긴다.
왜 굳이 약속시간 알람을 이르게 설정했을까.
왜 굳이 경로를 미리 알아보고,
왜 굳이 10분 먼저 길을 나섰을까.
그래서일까. 얼마 전
부터
이런 태도를 조금 바꾸고 싶었다.
예전에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혹은 예의 없었던 사람들이 했던 것처럼,
별다른 이유 없이 약속 당일 갑자기 불참 통보를 한다거나 하고 싶었다.
(아직 성공하진 못했다)
내가 그동안 그 자리에 참석한다고 밝히고 시간 맞춰서 나간 건,
내 안의 특별하게 성실한 DNA가 있어서가 아니라,
약속과 참석 사이에 있는 당연한 그 인과관계를 끊지 못해서다.
약속을 했으면 참석을 하는 거고,
참석을
하기
싫으면
약속을
아예
안
잡는 거니까.
며칠 전, 고등학교 때부터 오래 봐온 선후배 모임이 있었다.
한 선배는 1년 전 나의 결혼식에 불참했다는 이유로 축의금을 들고 온다고 했고,
한 선배는 미국에서 잠깐 들어온 김에 날짜를 맞췄었다.
약속시간도 요일도 내 업무와 겹치지 않아서 당연히 참석하기로 했었다.
그런데,
약속 전날
문득 가
기
싫은
마음이
들었다.
그 마음은 약속 당일 오전까지도 계속 됐고, 모임에 오기로 한 친구한테
"내가 안 가도 별 일 안 생기겠지?"라는 카톡을 썼다가 전송 직전까지 갔었다.
이유는 딱히 없었지만 만들어낼 핑계는 무수했다.
전날 과음을 해서(이건 팩트), 갑자기 출장이 잡혀서, 보고서 하나가 급하게 필요해서,
간 건강이 염려돼서, 한약을 먹게 돼서 등등.
하지만 가고 싶지 않은 진짜 이유는 하나였다.
"그냥."
아마, 내가 그동안 탐탁지 않게 생각했던 불참자들의 대부분은 이 이유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다만 '그냥'이라고 내뱉을 용기가 없었겠지.
(아 딱 한 명 있었다. 대학교 때 어느 후배. 일주일 전에 잡은 약속을 약속시간 5분 전에 이렇게 문자 통보를 했었다. '오늘 제가 나갈 기분이 아니에요. 죄송해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친구는
어쩌면
솔직한
편이었다.)
결론적으로는 그 모임에 '예전처럼' 참석했다.
미적거린다고 미적거리다가 출발했는데, 약속시간에 딱 5분 늦었고,
나보다 성실한 친구 하나만 먼저 와있었을 뿐이었다.
오늘도 실패.
왜 난 늘 성실한 참석러일까,라는 질문은 이제 그만해야겠다.
억지로 약속시간에 늦거나 시답잖은 이유로 당일 취소를 해버리는 건 불편해서 못할 일이다.
내가 한가해서 먼저 나가거나 기계적인 성실함을 따르는 게 아니라,
누군가를 반기기 위해서 먼저 나가는 거라고 합리화해 버리는 게 편하겠다 싶다.
그래도, 성실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후로 하나 변한 건 있다.
어쩔 수 없이 잡히는 단체모임에는 "어쩌지?" 싶다가도,
이제 마음 편하게 불참의 의사를 미리 표시한다.
이것만 해도 큰 발전이다. 예전에는 그걸 말하는 전에 이리저리 고민하고,
누군가가 다시 오라고 말하면 고민을 새로 시작하곤 했으니까.
여하튼,
성실한 참석자는 이제 그만.
내가 성실한 불참자가 될 그릇은 아니니,
그냥 적당한 참석자 정도로 만족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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