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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Aug 28. 2022

우연과 호감이라는 판타지

#영화 「경주」(장률 감독, 2014)

그리움 같은 건 들키지 않기를, 처음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기를.

지금 이 진공관 안에서 끝끝내 중심 잡기를.


-詩 '우리의 생애가 발각되지 않기를' 중, 허연 시집「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두 주인공 최현(박해일)과 윤희(신민아)의 옆은 비어있다.


최현은 북경에 있는 여자 친구와 헤어진 참이었고, 윤희는 남편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후 혼자 지내고 있다. 처음부터 혼자였다면 상관없었을 텐데, 함께 하던 누군가가 없어진 이들은 비어있는 옆자리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영화는 두 사람을 화면의 중앙에 가져다 놓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차를 마실 때, 상대방을 응시할 때, 그들은 화면의 정중앙에 홀로 위치한다.

둘이 한 화면에 잡힐 때도 영화는 중앙을 버리지 않는다.

둘은 종종 포개져서 화면의 가운데에 있기도 하고, 정확한 대칭을 이루며 서로를 바라보며 대화를 함으로써 둘 사이의 중앙을 상기시킨다.


그것은 티 내고 싶지만 티를 내지 못하는 외로움을 가진 이들에게 적합한 구도다.

그래서 둘은 내내 흔들린다. 가장 안정적인 구도에서.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81255

친한 형의 장례식 소식에 오랜만에 한국을 찾은 북경대 교수 최현(박해일)은 문득 7년 전 죽은 형과 함께 봤던 춘화 한 장을 떠올려 충동적으로 경주로 향한다. 춘화가 있던 찻집을 찾은 최현은 아름다운 찻집 주인 윤희(신민아)를 만나게 된다. 대뜸 춘화 못 봤냐 물은 최현은 뜻하지 않게 변태(?)로 오인받게 되고, 찻집을 나선 최현은 과거의 애인 여정(윤진서)을 불러 경주로 오게 한다. 반가워하는 최현과는 달리 내내 불안해하던 여정은 곧 돌아가 버린다. 다시 찻집을 찾아온 최현을 지켜보던 윤희는 차츰 호기심을 느끼게 되고, 윤희의 저녁 계모임 술자리까지 함께하게 된 최현과 윤희 사이에 기묘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하는데...(출처 : 다음 영화)


영화의 줄거리 소개나, 예고편을 보면 발랄하고 낭만적인 로맨스를 의도한 듯 보이지만, 실제 영화는 그렇지 않다. 이틀 간의 만남 동안 두 주인공은 차분하고 현실적이다.


찻집 주인인 윤희는 우연히 들른 비밀스러운 손님인 최현이 궁금하고,

최현은 주위에서 경주의 여신이라고 말하는 단아한 윤희에게 끌린다.

처음이어서 존재하는 둘 사이의 거리를, 둘은 짧은 대화와 긴 응시로 채운다.



물론 그렇게 조용하게만 끝나지 않는다.


윤희 지인들과의 술자리가 끝나고 노래방에 간 후부터 둘의 속마음은 툭툭 불거져 나온다.

최현은 윤희가 서서 노래를 부를 때 조용히 두어 걸음 옆쪽으로 나가 혼자 춤을 추고,

자신을 짝사랑하는 지인의 앞에서 윤희는 최현과 더 산책을 하다가 간다고 말한다.

그녀는 집에 최현을 들인 후, 귀 한번 만져봐도 될까요, 묻기도 한다.


조용하지만 어색하지 않은 이런 과감함은,

밤의 시간이기에 가능했겠지만, 경주라는 공간이기에 더 도드라져 보인다.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경주는 시간이 섞이는 곳이다.


오래된 골목과 더 오래된 능들이 무심한 풍경으로 이어지는 경주는,

과거와 현재를 모두 담고 있으면서도 선후(先後)를 강요하지 않는다.


그건 최현과 윤희 두 사람 개인적으로도 마찬가지다.

7년 전 경주에서의 추억에 집착하는 보이는 최현은, 금세 윤희가 있는 현재의 경주에 동화돼 버린다. 공허해 보이는 경주의 여신 윤희는 모든 걸 이해하는 듯한 담담한 미소를 유지하며 조용히 자신의 찻집을 지키지만 과거의 그녀는 놓지 않고 있다.


둘 모두에게 지금과 지금이 아닌 예전의 시간이 같이 존재한다.

이렇게 시간이 섞이면 감정은 오히려 고요해진다.



그건 왕릉으로 대표되는 경주의 풍경과도 일맥상통한다.


수천 년 전에 죽은 누군가를 안에 품으면서도 지금 살고 있는 누군가의 시선을 매일 받고 있는 능들. 어떻게 보면 그걸 동네 풍경으로 두고 사는 경주는 특별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 모두 크고 작은 죽음의 경험과 같이 산다는 점에서, 길게는 우리 자신의 필연적인 죽음을 늘 인식한다는 점에서 능의 풍경은 오히려 심상할 수 있다.


능으로 소풍을 가고, 능 사이의 길에서 데이트를 하고, 밤의 능의 완만한 곡선에서 위안을 받는다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영화 경주는 장률 감독 특유의 작은 판타지들이 곳곳에 등장한다.

그건 감독이 풀어주는 친절한 은유일 수도 있고, 단순한 장난기일 수도 있다.


처음 찻집에 들렀다 떠나는 최현이 대문에 서서 윤희가 서 있는 찻집의 풍경을 휴대폰으로 찍었음에도 윤희는 사진 속에 없다. 최현은 잠시 갸우뚱하고 제갈길을 간다. 아마 이때까지만 해도 그의 마음속에 그녀가 담기지 않았음을 의미할 것이다.


과거의 애인이었던 여정이 최현의 부름에 서울에서 잠시 경주에 와서 둘이 산책하는 장면.

슈퍼 앞의 평상에서 물을 마시는 두 사람에게 다가온 할아버지는 대뜸, 서울에서 온 처자 나 좀 봐,라고 말한다. 여정은 별다른 의아함을 내비치지 않고 할아버지가 들어간 사주명리학 천막으로 들어간다. 영화의 후반, 혼자 그곳을 찾은 최현은 천막을 지키는 젊은 여자에게 할아버지는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 어제도 자기가 이곳에서 사주를 봤노라 말하는 여자는 잠시 생각하고는 원래 이곳의 주인이었던 자신의 할아버지는 몇 년 전에 돌아가셨다고 말한다.



이 밖에도, 장례식에서 본 죽은 선배의 아내와 최현이 뜬금없이 윤희의 찻집에 앉아 대화를 한다든가,

마른 냇가에서 7년 전에 들었다는 물소리를 듣는 장면 등도 현실과 환상을 짧게 오간다.


이러한 설정들은 앞서 말한 과거와 현재의 공존을 말하기 위한 장치일 수도 있지만, 경주라는 도시에서의 로맨스를 다루고 있는 감독의 장난기 있는 배려일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이런 작은 지점들로 인해, 두 사람의 호감이라는 판타지를 다루고 있는 이 영화는 더 풍성해지고 관객은 살짝 들뜨게 되니까.



도시 이름을 타이틀로 내건 여타 영화들처럼, 도시의 대표적인 공간을 친절하게 보여주진 않는 영화이다. 하지만 윤희가 운영하는 한옥 찻집부터 둘이 걸어 다니는 단층건물 가득골목 풍경만으로도 영화는 경주를 영화의 배경으로 쓴 책무를 다 했다는 생각이 든다.

2022년 현재의 황리단길 같은 대표적인 거리가 등장하지 않더라도, 8년 전의 경주는 충분히 경주스럽다.


개인적으로, 몇 개의 설정(최현이 교수라는 직업을 가졌다는 점, 최현의 옛 연인 여정이 현재 남편의 의처증으로 시달린다는 점, 윤희에 대한 욕망을 숨기지 않는 무례한 술자리 대화 같은)이 진부하긴 하다. 하지만 새로움을 위해서 굳이 비현실적인 설정을 감내할 건 아니고 오히려 이런 뻔한 설정으로 인해 주인공들의 이야기에 더 집중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나쁘지 않다.


조선족 출신의 중국과 아시아의 대표 감독이라는 장률 감독의 정체성에 따라, 영화에는 중국과 일본이 자연스럽게 묻어 있다. 낫또를 즐겨먹으면서도 공원에서 태극권을 자연스럽게 따라 하고 윤희의 성(性)이 공 씨임을 듣고 공자의 후손임을 강조하는 최현의 취향은 일견 복잡해 보이지만 매우 익숙한 모습이다. 찻집에 있던 두 명의 일본인 관광객이나, 여행안내소에서 어설픈 중국어로 최현에게 말을 거는 안내원 등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요소들은 영화에의 몰입을 방해한다기보다는, 완만하게 진행되는 두 사람의 감정선 외의 볼거리를 더해준다.



8년 전의 영화임에도(2014년이 벌써 8년 전이라니!) 경주는 전혀 오래돼 보이지 않는다.

그건 앞서 말했든 시간이 섞이는 경주라는 공간의 힘일 수도 있고, 절제된 카메라 워킹과 섬세한 빛 연출로 장면들을 담아낸 연출 스타일 덕분일 수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영화에서 그리고 있는, 우연히 만나 호감을 갖게 되는 두 사람, 이라는 설정의 힘이 아닐까 싶다.


그건 옆이 비어있는 누군가나, 옆을 채워보지 않은 누군가가 공히 바라는 현실적인 판타지일 테니까. 막상 현실에서 우리 자신에게 그런 상황이 닥치면, 높은 확률로 드라마틱한 전개나 결말이 없겠지만 그래도 영화 경주의 반의 반 정도라도 가능하다면 충분히 바랄 수 있는 꿈 아닐까.



* 로맨스를 정의함에 있어서, 불같은 감정의 전개에 방점을 둔다면 이 영화는 굳이 선택하지 않아도 되지만, 감정의 흔들림 쪽을 생각하면 한 번쯤 봐도 좋을 영화이다.


* 얼마 전 '갯마을 차차차'를 뒤늦게 보고 신민아에게 감탄했는데, 8년 전 서른 살의 신민아를 보는 재미도 영화의 장점 중의 하나이다. 물론 서른일곱 살의 풋풋한 박해일의 모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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