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미덕으로
어떤 일을 ‘미루는 ‘ 행동은 나쁜 거라고 배워왔다.
숙제도, 약속도, 할 일도 미루는 것은 부지런한 개미상을 추구하던 한 세대 이전에는 게으르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나 하는 행동으로 여겨졌다.
내게도 꽤 오랜 시간 동안 ’ 미루다 ‘는 부정적 이미지의 동사였다. 처음으로 그 말의 이미지가 전환된 순간은 살림을 시작하며, 이것저것 책을 찾아보던 중에 갑자기 찾아왔다.
’ 소비를 미루세요.’라는 글귀였다.
소비를 미루는 과정에서 불필요한 지출이 줄어든다는 취지였다. 그날 이후, 내게 ‘미루다’는 주부로서 절약이라는 거대한 명분을 등에 업은 합당한 행위로 자리 잡았다. 실제로 너무 필요해 보이던 물건도 일주일만 지나면 별로 중요하지 않아 보이는 일이 많았다.
식재료도 늘 먹는 것들(두부, 계란, 우유, 숙주, 양배추, 사과, 케일 등) 외에는 장바구니에 담아두고 일단 미룬다. 미루다 보면 할인하는 때가 오고, 그때 100원이라도 저렴한 가격에 구입한다.
그렇게 미루다 보니 덕을 본 일이 하나 더 생겼다.
내가 ‘정숙 씨‘라고 부르는 우리 집 정수기, 꽤 오래된 건 인지하고 있었으나 만 7년이나 됐다고 연락이 왔다. 원래도 13,900원으로 비교적 저렴한 모델이었는데, 5년이 지난 후부터는 8,900원으로 가격이 다운된 채 사용하고 있었다. 7년이 지나니 기계도 동일모델 새 거로 바꿔주고, 셀프가 아닌 일반 관리형으로 하는데 월 7,900원에 해 주겠다는 연락이 왔다.
’사… 사기꾼인가?‘
싶었으나 전화 걸려온 번호가 꾸준히 우리 집에 오시던 여사님 같았다. 사실 여전히 물이 잘 나오기도 했고, 이왕 바꿀 거 냉수가 되는 기종으로 바꿔야 하나 고민하느라 미룬 거였는데, 한 달 7,900원이면 마트 생수 사 먹는 가격과 비슷하거나 더 저렴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당장 다음 주 중으로 약속을 잡았다.
저녁에 가족이 모두 모였을 때,
“다음 주에 정수기 바꿀 거야.”
라고 말하자, 다들 눈이 동그래졌다.
‘물이 나오는데 바꾼다고? 뭐로?‘
이런 분위기였다.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남편은 좋아했고, 내심 냉수가 콸콸 나오는 정수기로 교체를 바라던 아이들은 실망했다.
사실 우리 집에 들어온 물건이나 가구들은 망가지거나 고장이 나기 전에는 바뀌는 법이 거의 없다.
’멀쩡한데, 좀 더 쓰자.’,
’ 다음 달에도 사고 싶으면 사자.‘
하고 미룬다.
아마 나도, 남편도 그런 부모님을 보고 배운 것도 있고, 각자 어린 나이부터 독립해 살며 몸에 밴 자취습관이기도 할 것이다. 악착같이 아끼고 모으진 않지만, 그렇다고 제 기능 하는 물건을 취향이나 미관상의 이유로 바꾼적도 없다.
지금 그렇게 미루는 항목이 하나 더 있는데, 믹서기다. 매일아침 사과와 케일을 갈아먹은 지 두 달이 넘어가는데, 사용하던 믹서기가 오래되어 새는 바람에 버리고, 한 달 넘게 핸디믹서로 대체하고 있다. 아예 대안이 없다면 모를까, 좀 불편해도 그냥 쓰니 또 써져서, 3-4만 원짜리 믹서기도 장바구니에 담아두고 한 달째 미루고 있는 중이다. 용량이 적어 매일 조금씩 넘치니 불편하긴 하다. 이건 조만간 사게 될 지도 모르겠다.
풍요의 시대고, 터치 몇 번이면 다음날 문 앞으로 배송받을 수 있는 시대지만, 덜 사고, 버티고, 미루는 내게 맞는 속도로 사는 것도 나름의 매력이 있는 것 같다. 환경보호나 절약과 같은 큰 명분과 상관없이, 그저 부지런하지 못해 미루는 것이지만, 이렇게 허울 좋게 합리화할 수 있어서 기쁘다.
똑같은 모델로 교체를 했습니다.
교체 전 vs 교체 후
너무 감쪽같이 똑같아서 놀랍지만, 자세~히 보면 표면 질감이나 불빛이 조금 다르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