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밥
30여 년 전, 초등학생이던 나는 가끔 할머니댁에서 자곤 했는데, 자려고 누울 때면 할머니가 이런저런 옛날 얘기를 해 주셨다.
일제강점기 얘기(할머니는 ‘왜정 때‘라고 불렀다.), 할머니의 어린 시절 얘기, 아빠의 어린 시절얘기 등, 이야기 주제도 다양했는데, 그중 먹을 거 없던 시절 열 세 식구 끼니 해결하는 게 어찌나 걱정스러웠나 모른다는 얘기가 기억이 난다.
고구마죽도 끓여보고, 멀건 시래기 된장국도 끓이며 어떻게든 끼니를 해 먹는 게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당시의 나는 그저 없는 식재료로 대량의 식사를 준비하는 게 힘드셨겠구나, 단순히 노동의 측면에서만 생각했다.
매일 4인가족의 아침, 저녁밥을 차리는 지금, 할머니의 그 말이 조금은 이해가 된다. 그 시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풍족하지만, 우리 가족의 끼니를 챙기는 지금의 나도, 늘 ‘뭐 먹지?’를 고민한다.
감사하게도 매일 저녁 고기반찬을 먹을 수 있고, 신선한 과일, 채소도 먹을 수 있지만 그런 와중에도 메뉴에 대한 고민은 끝나지 않는다.
적절한 식비를 사용하며, 식재료 낭비도 없어야 하고, 아이들 영양도 고루 챙기며, 맛있고, 학교, 유치원의 식단과 겹치지 않는 메뉴를 매일같이 차려내는 일은 쉽지 않다.
처음에는 일주일치 식단을 짜서 생활해 봤다. 재료낭비도 적고 고민 없이 정해진 메뉴를 하면 되니 좋았다. 단 하나의 단점은, 혹시 내가 몸이 안 좋거나, 갑자기 가족들이 다른 메뉴를 먹고 싶어 해 미루게 되면 그다음 메뉴들까지 다 밀려버리며 결국 버려지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그래서 다음으로 시도한 게 요즘 유행하는 ‘밀키트‘만들기였다. 몇 년 전만 해도 밀키트 만들기라는 표현은 없어서 그저 재료를 소분해 얼리거나 국, 찌개를 얼려뒀다 먹는 방식이었다. 편하고 재료가 상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지만, 역시 갓 만든 반찬만 못해서 그런가, 늘 남았다. 먹는 기쁨이 중요한 내게 아쉬운 맛이었다.
그다음으로 시도해 본건 메인 1가지 먹기였다. 요일별로 소/돼지, 가금류, 생선을 돌려가며 메인을 정하고 그거 한 종류만 먹었다. 밑반찬이 없으니 편한데, 채소에서 얻는 영양이 충분해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여러 가지를 시도 한 끝에 지금은, 예전 엄마가 그랬듯, 할머니가 그랬듯, 몇 가지 밑반찬을 해 두고, 국, 찌개를 끓이고, 고기반찬을 하는 일반적 집밥을 해 먹고 있다.
돌고 돌아 결국 순정이라 했던가,
밑반찬은 3-4가지로 주 2회 만들고, 메인은 매일 다른 걸 먹는다. 이 메뉴 구성이 가족들의 만족도가 가장 높다. 손이 많이 가지만 일단 해 두면 갑자기 먹게 되더라도 냉장고 속 밑반찬만으로도 해결할 수 있다.
우리 집 생활비 중 가장 큰 지출은 언제나 식비다. 외식이나 배달을 자주 하지도 않는데, 식비가 가장 큰 이유는, 다른데 딱히 돈을 쓰지 않기도 하지만, 제철채소, 과일, 특산물 등을 꼭 먹이려고 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최대한 다양한 반찬을 맛 보여주고 싶다. 나중에 자라서 내 품을 떠나도, 제철채소, 과일, 지역특산품등을 알고 때에 맞춰 챙겨 먹을 줄 아는 사람이면 좋겠다는 작은 소망이 있다.
먹는 게 중요하다는 말은 최근 들어 더 많이 들린다. 개인적으로 먹을 것을 잘 챙겨 먹는 것은 회복탄력성과도 일정 부분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경험으로 봤을 때, 평소 나를 잘 먹여 보살펴두면, 힘든 순간이 왔을 때도 무엇이든 먹고 극복할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엄마가 해 준 집밥, 하루 종일 생업에 종사하다 귀가한 늦은 저녁 차려진 집밥, 소박해도 응원의 마음을 꾹꾹 담은 밥 먹고 아이들도, 남편도 몸과 맘이 모두 튼튼하면 좋겠다.
수십 년 전 할머니도, 식구들에게 조금 더 좋은 음식을 넉넉히 먹이고 싶으셨으리라, 그럼에도 내어줄게 멀건 국물뿐이라 배고픔보다 그 마음이 힘드셨던 게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때로는 귀찮을 때도 있지만(그런 날 이용할 반찬가게도 찜 해놨다.) 대부분의 날들은 늘 기쁘고 뿌듯한 맘으로 부엌에 선다.
그런 의미에서 주말 저녁은
다들 좋아하는 제육볶음을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