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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자재마트

제2의 고향

by 까까멜리아

최근(두어 달쯤 됐다.) 새로 다니는 마트가 있다. 같은 동네지만 차를 타고 10분쯤 가야 하는 거리에 있는 ‘농산물 식자재마트’다. 생긴 지 몇 년 된 곳이고, 오며 가며 종종 봤던 곳이지만, 투박한 외형에 ’ 식자재‘라는 타이틀이, 어쩐지 자영업자분들이 박스채 대량으로 장을 보는 그런 곳인 것 같아 감히(?) 들어가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내가 갈 곳이 아니다 생각한 그곳을 가게 된 것은, 요즘 장바구니 물가 덕분(?)이었다. 아무리 온라인몰 쿠폰을 받아보고, 대형마트 미끼상품 위주로 장을 봐도 우리 집 엥겔지수는 천정부지로 오르기만 했고, 대안을 찾으려던 중, 번뜩! 전에 봤던 ‘식자재마트’가 떠올랐던 것이다.


여느 때와 같이 아침 준비를 하던 중, ‘오늘은 식자재마트를 한 번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하는 대부분의 일은 이렇게 급작스레, 불현듯, 문득 실행하는 경우가 많다.


두 아이 아침 라이딩 마치고 차 탄 김에 바로 마트로 향했다. 주차를 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른 분들의 동태를 살핀 후, 능숙한 척, 밖에 세워진, 살짝 녹이 슨 빨간 카트를 밀며 입구로 들어갔다.


매장 안에는 사람들이 꽤 됐지만, 대부분 우리 엄마 연배 분들이 많았고, 젊은 분들은 박스채 카트에 담는 모습으로 보아 음식점 사장님으로 보이는 남자분들이 대부분이었다.


‘역시, 잘.. 못 온 건가…?’


그래도 이왕 온 거, 한 바퀴 돌아보기로 하고, 과일, 채소, 나물, 고기, 생선, 가공식품, 공산품까지 싹 훑어봤다. 확실히, 내가 장 보던 곳들보다 저렴했다. 게다가 박스단위가 아닌 소량도 구매가 가능했다.


필요한 품목 몇 가지를 담고, 계산을 한 뒤, 회원가입을 했다. 집에 돌아와 영수증을 다시 살펴보니, 최근 들어 내가 장 본 곳들 중 가격이 가장 낮았다.


‘앞으론 여기서 장 봐야겠다.’


가입이 승인된 다음 날부터, 매일아침 카톡에 온라인 전단지가 날아온다. 장 봐야 하는 날이 오면, 전단에 나온 상품 위주로 선택해 사 오는데, 단언컨대 온라인 새벽배송보다 20%가량 저렴하다.


단전에서부터 신남이 턱밑까지 차올랐다.


’ 세상에, 이런 보석 같은 곳을 찾아낸 나, 칭찬해.‘


백화점 7-80% 시즌오프 세일을 발견해도 이만큼 기쁘진 않을 것이다.

이 기쁨을 나누고 싶어 어느 날 저녁엔 남편을 데리고 마트에 방문하기도 했다.

공산품이나 가공식품은 온라인보다 조금 비싼 느낌이었지만, 신선식품을 주로 먹는 우리 집에는 딱인 곳이다.


내가 주로 사는 품목은 바나나, 오이, 버섯, 양배추, 두부, 고기, 생선, 어묵, 우유이고, 여기에 아이들 먹을 간식거리를 추가로 더 사는 게 보통이다.

생선은 구입의사를 밝히면 그 자리에서 손질을 해 주시거나, 이미 손질된 채 패킹되어 있어서, 집에서는 살짝 씻어 굽기만 하면 되니 세상 편하다.

사흘 치 고기와 식재료를 사도, 5만 원이 안 넘는, 요즘 같은 ‘고물가시대’에 그야말로 ‘돈 쓸 맛 나는’ 곳이 따로 없다.


투박한 그 마트가 이제는 친근해졌다.

또 한 번, ‘이 지역 사람’이 된 것 같은 순간이었다.


어느 낯선 곳에 ‘정착’한다는 것을 다른 말로 ‘뿌리내린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지금 내가 사는 지역은 결혼한 후 처음 살게 됐지, 그전에는 하루도 살아본 적이 없는 곳이었다.

일가친척, 친구, 지인 하나 없던 이 동네에 하나 둘 아는 사람이 생기고, 동네 곳곳, 내가 애착을 갖는 곳이 하나둘씩 늘어갈 때마다 뿌리가 한 가닥씩 내려지는 기분이다.


매일같이 운동하러 가는 공원도 그렇고, 식자재마트도 그렇고, 식단관리 이슈로 요즘은 못 먹지만 좋아하는 망개떡집이 그렇고, 가끔 매운 게 땡기는 날이면 포장주문 전화를 하고 찾아오는 매운 주꾸미집이 그렇다. 이렇게 나는 10여 년에 걸쳐 천천히, 두 번째 고향에 정착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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