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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

표현하지 않았지만 받았다.

by 까까멜리아

숙소를 잡는 1박 이상의 여행을 갈 때마다, 우리 네 식구가 하룻밤새 만들어낸 쓰레기 양을 보며 남편이 깜짝 놀란다. 사실 집에서는 남편이 깜짝 놀란 쓰레기 양의 몇곱(몇일치)을 받고 분리수거에 음쓰까지 떠블로 가는 날이 많다. 쓰레기 정리를 하다 보면 정말이지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어쩜 이리 쓰레기가 많지?’

‘우리가 너무 많이 먹나?’

‘아냐, 요새 마트 물건도 포장이 너무 과해.’

‘이 많은 쓰레기들을 파묻을 곳이 아직 있나?’

‘분리수거해봐야 재활용도 안된다는데…‘

‘음쓰, 이걸 정말 사료로 만들 수 있나?‘

‘사료로 못 만들면,

그냥 일반쓰레기로 버리는 게 낫지 않나?’


이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가,

아빠라는 종착지로 이어진다.


아빠는 내가 초등학교 입학할 무렵부터 은퇴하는 날까지 청소차 운전기사로 일하셨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게 초등학교 2학년 즈음, 나는 집에서 울고 있었고, 이유는 친구들이 ‘너네 아빠 쓰레기차 운전한다.’고 놀려서였다. 새벽일을 마치고 잠시 식사하러 집에 왔다가 엄마의 말을 전해 들은 아빠는 내 옆에 다가와 무어라 말을 했던 것 같은데, 그게 무슨 말이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원체 말주변도 없고 다정하지도 않은 아빠의 성격상 ‘괜찮다, 미안하다.’이런 종류의 말이 오가지 않았을까 싶다.

아홉 살의 나는 그때 어떤 말을 듣고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 기억은 없지만, 그날 이후부터 나는 아빠를 창피해하지 않았다. 친구들과 함께 가는 하굣길에도 아빠의 청소차가 보이면 양팔을 높게 들고 흔들며 인사를 했다. 그럼 아빠도 높은 차 안장에서 창문을 열어 반갑게 인사를 해 주곤 했다.


다만 그때, 나를 키워낸 아빠의 생업이 친구들의 놀림감이 되어 한바탕 울었던 그 사건은, 그날 이후 지금까지 30년 넘게 내 맘속에 아빠에 대한 부채감으로 돌덩이처럼 남아있다. 그때의 나는 어렸지만, 사과를 하지 못했고, 자란 후에는 너무 미안해서, 미안하다는 말조차 꺼낼 수 없어서, 이만큼의 부채감은 평생 잊지 않고 지내는 중이다.


아빠와 친한 딸들이 많다지만, 난 아빠와의 유대감이 ‘0’에 수렴하는, 둘이 있으면 딱히 할 말이 없는 무덤덤한 부녀지간을 수십 년째 유지하고 있다. 아마 그래서 더 이런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혹은 웃어넘기면서도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아빠가 은퇴한 지도 10여 년이 지났지만, 나는 아직도 종량제 봉투를 볼 때마다, 쓰레기 수거함을 지나칠 때마다, 청소차와 미화원분들을 마주칠 때마다 그 시절의 아빠를 떠올린다. 사회성이 좋지 못한 아빠가 남들이 기피하는 일을 업으로 삼아 수십 년 직장생활을 하며 견뎌냈을 그 시간으로, 내가 이만큼 자랐음을 떠올리고, 감사한 마음으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받은 사랑을 내 아이들에게 아낌없이 주리라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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