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아프지만 명랑한 사람
“나는 맞고 살지만 명랑한 년이에요. “
드라마 ‘더 글로리’에 등장한 대사다.
이 말을 듣는데 묘한 동질감이 솟았다.
‘나는 아프지만 명랑한 사람이다.’
처음 병을 진단받았을 때는 물론이고,
때때로 찾아오는 우울감에서
매번 나를 건져내 주는 것, 바로 이 ‘명랑함’이다.
남편과는 꽤 오랜 기간 연애 후 결혼했는데
한 번은 나랑 왜 결혼했는지 물었다.
‘예뻐서’, ‘사랑해서’라는 등의 낯간지러운 답변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돌아온 답변은 처참했다.
“웃겨서”
‘이런;;; 괜한 걸 물었네, 내가……’
그렇다.
내 결혼의 비결(?)은 웃겨서였던 것이다.
‘웃겨서’ 말고 ‘유쾌해서’‘밝아서’‘활달해서’와 같이
좀 있어 보이는 단어를 선택할 수는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밝고 명랑한 성향은 후천적 환경도 중요하지만
일정 부분 타고나는 게 맞는 것 같다.
다만 신과 부모님은 내게 밝고 명랑함을 주시고
인내와 끈기는 깜빡 잊으신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한다.
나는 끈기 있고 신중한 사람이 아니다.
새로운 것에 늘 관심이 많고
이것저것 시도하는 것도 많으며
그만큼 금방 포기하는 것도 많다.
어떤 선택에 있어 고민의 시간도 짧은 편이다.
하지만 나는, 내가 우직한 큰 산 같은 사람보다는
바람 불면 나부끼는 민들레 홀씨 같은 사람이기에
나쁜 감정도 빨리 털어낼 수 있는 거라 생각한다.
나쁜 감정을 빨리 털어내면 그 빈자리는
밝고 즐거운 감정이 채운다.
몸이 아파 할 수 없는 일 앞에 억울해하기보다는
‘오! 이건 된다. 할 수 있겠는데?’라며
다른 일에 덤벼드는 형식이다.
그렇기에 매일 약을 먹어야 해도,
혹여 무릎에 무리 갈까 등산을 못해도,
손목이 굳어 요가동작 하나 제대로 못해도,
나는 즐겁게 지낼 수 있다.
이거 안되면 저거, 저것도 안되면 다른 거,
오늘 안되면 내일, 내일도 안되면 모레.
지금 할 수 없는 일에 미련을 버리고
할 수 있는 다른 것을 찾으면 그만이다.
내가 가진 오늘에 감사하고
소소한 일에도 행복을 느끼는 것은
건강하던 때엔 미처 갖지 못했던 것 들이다.
병원에서 준 안내 책자를 보니
류머티즘 환자의 경우 일반인보다 우울감에 빠질
확률이 2-3배 높다고 적혀 있었다.
내 경험에 비추어 추측해 보자면,
류머티즘은 전신성질환이기 때문에
한번 통증이 지속되면 온몸이 무겁고
움직이는데 불편함이 생긴다.
몸에서 오는 불편함은 자연스레 무기력감으로
이어지고 이런 일이 지속되면
우울감에 빠지는 것이라 생각한다.
보통의 우울증 환자에게는
‘햇볕을 맞으며 걷기‘가 큰 도움이 된다고 한다.
하지만 발목이 아프고 발가락이 아프고
무릎이 아파서 오는 우울감을
걸어서 해소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가끔 내게도 그런 시간이 찾아온다.
몸이 안 좋은데 남편은 바쁘고,
두 아이를 온전히 내가 챙겨야 하는 순간들.
마음은 앞서지만,
육아며 살림 모두 제대로 할 수 없는 날들이 생기면
속상한 감정이 밀려오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있고만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땐 정말 그냥 눕는다.
거실 바닥 한가운데 대자로 누워서 아이들에게
“오늘은 엄마가
몸이 안 좋아 휴식이 필요하니까 20분만 잘게.”
하고 그대로 잠깐 잠을 자며 에너지를 충전한다.
두 아이들이 우당탕 쿵탕 나를 넘어 다니든 말든,
그 자리에서 잠깐이라도 쉬고 나면
몸도 마음도 한결 나아진다.
손목이 아파 설거지를 못하면
‘설거지 좀 못 해두면 어때?’ 하고 쌓아둔다.
좀 쉬었다가 괜찮아지면 그때하고
웬만하면 식기세척기의 도움을 받는다.
그 조차 힘들 땐 남편에게 부탁한다.
우울한 감정이 밀려오면 마음의 소리에 집중한다.
그러다 조금이라도 하고픈게 생기면 미루지 않고
당장 실행해 본다.
보송한 이불에 드러눕거나, 밀린 드라마를 보거나,
책을 읽기도 혹은 글을 쓰기도 하고 멍도 때린다.
통증이 오더라도 매일,
24시간 아픈 건 아니기 때문에 심할 때는 그냥 쉬고
괜찮아지면 틈틈이 할 일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
맛있는 것을 먹는다.
눈물은 아래로 흘러도
밥숟가락은 위로 흐르는 법이라고
일단 만족스러운 음식으로 배가 차고 나면
마음도 편안해지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힘든 순간을 버티다 보면
다른 무언가에 관심이 쏠리는 때가 오는데
그때가 우울감에서 한 발 빠져나오는 순간이다.
수명은 길어지고 환경은 나빠진 현대엔
누구나 아플 수 있다.
특히나 나같은 난치성질환자는
완치의 개념이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런 상황이 닥쳤을 땐,
내 삶의 목표만 좇던 망원경을 잠시 내려두고
내 삶의 작은 부분들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현미경을 들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동안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일상 속 작고 소소한 부분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오래 산 것은 아니지만, 지금껏 살아보니
인생의 변곡점을 맞이한 후
어떤 태도로 상처를 치유해 가는지에 따라
삶의 만족도가 달라지는 것 같다.
건강한 몸이었다면 훨씬 좋았겠지만
난 지금의 나도 충분히 가치 있게 느끼며 행복하다.
오늘 내게 주어진 행복의 가치를 알기에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이
더 반짝반짝 빛나는 삶이 될 것이라 믿는다.
더 글로우 리!(나는 ‘이’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