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10초면 된다.
엄마 집에서 나온 후 결혼하기 전까지, 자취하던 시절에는 엄마가 사다준 이불을 그대로 사용했다. 밖에서 보이는 옷이나 가방, 신발, 헤어스타일은 신경 쓸지언정 집에 들어가 잘 때나 덮는 이불에 내 취향이라는 것은 없었다.
엄마는 내게 한여름에 덮을 크고 화려한 꽃이 그려진 얇은 이불과, 겨울에 덮을 핫핑크 극세사 이불을 사다 주셨고, 나는 그 이불을 빨래방에서 종종 세탁해 가며 정말 마르고 닳도록 덮었다.
결혼을 앞두고 혼수장만을 시작하며 큰맘 먹고 좋아 보이는 거위털 이불을 구입했다. 이불의 ‘ㅇ’도 모르던 그 시기, 나는 무슨 패기로 혼자 이불을 사러 갔던가 싶지만, 이불 하나 사는데 번거롭게 지방에 계신 엄마와 함께 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가볍고 따뜻하다는 직원의 말에 홀랑 넘어가 적지 않은 금액을 주고 산 거위털 이불은, 얼마 뒤 슬슬 거위털이 삐져나오기 시작했다. 심지어 털 심지(?) 같은 게 가끔 툭 튀어나와 콕콕 찌르니 수면의 질이 떨어져 당장 내다 버리고 싶은 애물단지가 되어버렸다. 이불 가격이 아까워 덮지도 않을 이불이었지만 그 후 1년여를 더 옷장에 저장해 두었다가 결국 버렸다.
새 이불이 필요해지자 내가 아는 따뜻한 이불, 비교적 저렴한 퀸사이즈 극세사 이불을 다시 샀다. 이후 극세사이불, 홑이불, 차렵이불, 먼지 안나는 이불, 안티 00 이불 등등을 거쳐 이제는 이불에도 내 취향이 생겼고, 비싸지 않은, 그럼에도 꼭 맘에 드는 이불을 구입해 만족스럽게 덮고 지낸다.
예전처럼 극세사 이불은 사지 않으며, 퀸사이즈 이불도 사지 않는다. 나는 은근 침구류 먼지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었고, 묵직한 이불보다는 가벼운 걸 선호하며, 이불을 돌돌 말고 자는 스타일이라 남편과 이불을 각자 하나씩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가볍고 퐁신퐁신한 솜이 든, 겉 표면은 오코텍스 인증을 받은(이게 뭐가 좋은지 모르지만 왠지 더 부드러운 느낌이다.) 부드러운 면 소재, 단색의 슈퍼싱글사이즈 차렵이불이 내 취향이다.
침대패드는 사계절 내내 여름용 까슬한 것을 사용한다. 그래야 쾌적한 기분이 든다. 다시 한번 적어보지만, 이건 순전히 나의 취향이다.
시간이 꽤 지나 생긴 나의 취향이지만, 이 취향을 이기는 극 호가 있다면 호텔 침구가 아닐까 싶다.
여행을 가서 머물게 되는 숙소는 리조트나 호텔인 경우가 많다. 남편과 나, 둘 뿐이라면 게스트하우스나 모텔, 민박 등 좀 더 저렴하면서도 예약 없이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곳들을 갔을 테지만, 아이들을 데리고 갈 때는 잠자리가 중요해 값을 더 치르고 호텔이나 리조트숙소에 묵게 된다. 호텔이든, 리조트든, 방 문을 열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정돈된 새하얀 이불을 보면 내 집도 아닌데 기분좋은 편안함이 느껴진다. 이런 느낌은 아이도 똑같이 느끼는 것 같다.
어느 날 아이 이불을 사려고 알아보는데, 아이가 자기도 하얀 이불을 사달라고 했다. 흰색은 관리가 어렵다는 나의 만류에도 아이는 호텔에서 본 것 같은 하얀 이불을 원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어차피 관리는 내 몫인데… 아이에게 가당치도 않은 이유를 들었다. 그렇다고 진짜 호텔처럼 속이불과 겉이불을 살 수는 없었다. 타협해서 색깔만 ‘흰’ 침구로 결정했다.
하얀 침대패드와 하얀 이불, 하얀 베개커버까지. 흰둥이 침구류 세팅이 완성되자 아이는 매우 좋아했다. 방방 뛰며 좋아했던 처음과 달리 아이는 곧 시큰둥해졌다. 오히려 차콜색 이불로 뒤덮인 내 침대에 누워있기를 더 좋아했다.
‘색만 다른 같은 이불인데
왜 내 침대를 더 좋아할까?‘
여기엔 작은 차이가 있었다. 내 침대 이불은 언제나 평평하게 펼쳐져 있고, 아이 이불은 자고 일어난 상태 그대로 이리저리 구겨져 있다. 아이가 어릴 때는 이부자리 정리를 해줬지만, 초등학생이 된 후에는 정리해 주지 않는다. 이부자리를 정리하라는 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매일 아침 내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아이가 벌러덩 누워있으면
“엄마 이불 평평하게 펴 두니까 좋지?”
하고 물어만 본다. 나도 불과 몇 년 전까지는 자고 일어난 뒤 이부자리 정리를 하지 않았다.
‘어차피 내가 잘 거인데, 굳이 귀찮게?’
이런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호텔에 가면 기분이 좋아지는 이유가 집안일에서 멀어졌기 때문도 있지만, 언제나 깔끔하게 정돈된 이부자리를 보면 내가 대접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인 것 같았다.
‘정말 그런 걸까?’
그다음부터 매일 이불을 잘 정리해 두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이불을 정리하는 데는 10초 남짓밖에 걸리지 않았다. 대신 하루 종일, 잘 정리된 침대를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하루 10초로 이만큼 기분 좋게 만들 수 있는 일이 또 있을까 싶었다.
이제는 습관이 되어 내 이불뿐 아니라, 숙소 퇴실 전 이불도 펼쳐 정리해 두고 나온다. 어릴 때 엄마가 이부자리 정리하라고 매일같이 얘기해도 알았다 대답만 할 뿐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내면의 동기가 있어야 매일 같은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아이가 스스로 느끼고 움직일 때까지 기다리는 중이다. 너무 사소하지만, 나 스스로를 챙기고 존중받는 느낌을 갖게 하는 10초. 꼭 이불정리일 필요는 없다. 어떤 일이든 스스로를 존중하는 좋은 습관을 가졌으면 좋겠다.
나는 실행까지 한 35-6년 걸렸는데…
우리 아이는 얼마나 걸리려나…
부디 나보다는 빨리 깨닫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