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요가롭게
몸을 움직이니 마음은 가라앉고 생각이 비워진다
" 뭐라고요? 잘 안 들려요!"
민원인은 연신 미간을 찌푸리며 답답한 듯이 말했다. 나는 다시 한번 또박또박 큰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간다. 끝도 없이 반복되는 민원 응대로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 가슴이 막혀서 너무 갑갑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소리치고 싶어.'라는 말이 자꾸만 마음속에서 비집고 올라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원 업무에 걸맞은 미소와 차분함을 장착하고 친절의 갑옷을 두르고 나면 마스크 뒤에 감춰진 무채색의 표정은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기계적인 업무를 마무리한다.
이 길이 아닌 것 같았어도 누구보다 잘 맞는 옷을 입은 사람처럼 묵묵히 걸어 나갔다. 이 정도면 잘 버텨내고 있는 거라고 안심하다가도 정말로 언제까지 더 나아가야 할지 여전히 의문스러웠다. 흔들림의 순간마다 차곡차곡 쌓아 올린 모래주머니가 커다란 둑을 이루었다.
제법 단단해 보이던 보호막은 소리 없는 번아웃이 찾아오자,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고 더 이상의 보수공사가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내려놓을 결심을 한 지 사흘 만에 사직서를 내고 4월의 차가운 봄바람을 맞으며 마지막 퇴근을 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떻게 가야 하는지 어찌할 바를 모르던 나는 제 자리에 멈춰 섰다.
'공무원'이라는 달랑 세 글자를 지웠을 뿐인데 인생의 엔진이 꺼져버린 것 같았다.
앞을 향해 달리기만 했던 직장생활이 사라지고, 비어있는 달력을 견딜 수가 없어 분주히 청소하며 집안을 돌아다닌다.
그랬다. 나는 쉬는 법을 잊어버렸고 해소할 방법을 몰라 헤매고 있었다.
항상 내가 먼저 도움을 주는 사람이었기에, 도움을 청하는 게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비상구가 필요한 나에게 무엇이 어울릴까?' 고민하던 중
첫 번째로 심장이 쿵쾅거리는 줌바댄스 수업에 문을 두드렸다. 팔다리를 정신없이 흔들다 보니 심박수가 빨라져서 오히려 숨이 더 차올랐다.
다음은 빈틈없는 사운드에 골반을 힘차게 흔들어대는 밸리댄스 도전이었는데 이 또한 오래가지 못했다. 주변이 신경 쓰이는 전신 거울, 높은 데시벨의 기합 소리, 한순간도 쉬지 않고 이어지는 몸동작을 따라가다 보니 헉헉거리는 숨소리만큼이나 힘에 부쳤다.
마음의 체기를 빠르게 털어내기 위해 현란하고 신나는 댄스에 뛰어들었지만, 이상하게도 몸과 마음 모두 삐걱거렸다.
두 번의 실패 끝에, 오래전부터 묘하게 나를 끌어당기는 요가를 시작하면서 느릿한 움직임 안에서 내면의 변화가 일어났다.
" 오늘도 함께 호흡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루치의 요가 수업을 끝내고 나니 토닥이는 선생님의 목소리가 기분 좋게 들린다.
합장한 두 손을 모아 서로를 향해 고개 숙이며 마무리 인사를 나누고 작지만 커다란 뿌듯함이 밀려왔다.
그제야 한껏 긴장했던 어깨가 조금은 낮게 내려앉고 마음의 어지러움도 차분히 가라앉았다.
동작의 매 순간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온몸을 채웠다가, 배가 홀쭉해질 때까지 "후~"하고 비워낼 때 머리가 맑아지고 몸의 흐름이 부드러워짐을 느낀다.
무엇보다 동작과 동작 사이에 숨 고르는 시간이 주어지는데,
"힘드신 분은 아기 자세로 엎드려 잠시 쉬어갑니다."라며 살며시 초보자를 배려해 준다. 다정함이 묻어나는 말 한마디의 힘은 "당신이 조금 늦더라도 기다려 줄 테니 각자의 속도에 맞게 따라와도 괜찮다"는 응원으로 다가온다.
인생에서 어려움을 겪는 부분이 사람마다 다르듯이 그것을 풀어내는 방법 또한 나에게 맞는 옷은 따로 있는 것이다. 나를 위한 요가는 굳어진 어깨와 뻣뻣한 허리를 부드럽게 움직이는 과정을 거치면서 마음을 정돈하게 해 준다.
이제 나만의 속도에 맞는 맞춤옷을 입고서 충전해 가다 보면 다시 차오를 것이다. 내 인생의 엔진은 꺼지지 않았다. 잠시 배터리가 방전되었을 뿐.
나의 길을 나아가보자. 다가올 겨울에는 따스한 첫눈을 기대하며
"천천히, 요가롭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