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감청자

아름다운 무늬를 위한 청자의 변신

by 정작가


상감(象嵌)기법은 ‘새겨서 넣는다’는 뜻으로 저자의 표현의 따르면, ‘그릇 표면에 무늬를 음각으로 파내고 그 속을 백토나 자토로 메워 표면을 반듯하게 한 다음 유약을 발라 구워낸 것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백화 · 철화기법은 이 기법의 단점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상감기법이 발전한 것이라고 볼 때, ‘전체적인 표현이 산만하고 너무 강하게 드러나는 경향’을 보완해 줄 기법으로서 상감기법의 탄생에 기여한 것으로 친다면 반면교사로서 그 가치를 인정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상감청자의 편년 문제를 들여다보면, 전 문공유 무덤 출토 다완, 강화도 왕릉과 해저 발굴 청자, 13세기 전반 고종 연간의 청자 등의 유물을 통해 그 시기를 추정하고자 하지만 정확한 시기를 특정할 수 없는 것은 한계로 남는다고 할 수 있다.


대몽항쟁기의 문화적 상황 속에서 고려청자의 가치를 톺아보는 것은 전란의 상황 속에서도 민족적 서정이 짙은 그 가치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던 선조들의 의지를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무늬가 산만하게 보이는 백화 · 철화기법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탄생한 상감기법 또한 초기에는 주무늬에 그것을 적용하기가 쉽지 않았다. 해서 종속무늬에 이를 적용하고 처음에는 면(面)상감으로 무늬를 넓게 나타내기도 하였으나 이후에는 선(線)상감으로 방향을 옮겼던 것은 애초에 시도했던 대로 그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시행착오를 통해 점차적으로 상감기법은 그 가치를 다져갈 수 있었던 것이다.


상감무늬의 고려적 서정이 배이기 시작된 것은 초창기 시절만 하더라도 송나라의 풍의 기형이 많았고, 이를 떨쳐버리고 고려만의 독특하고 매력적인 기형으로 바꿔 갈 수 있었던 것은 다른 문화에 예속되지 않고 독자적인 예술을 펼쳐가고자 했던 고려인들의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상감청자에 새겨진 시로는 <청자상감시문표주박모양병>과 <청자상감시문매병>을 들 수 있다. 이 장에서 소개된 시를 보면, 이규보의 <녹색 자기 술잔에 부친 시>라고 하는 시를 볼 수 있는데 술잔을 구워내는 장인의 솜씨를 찬양하는 시로서 이런 자기를 빚는 상황조차도 시의 소재로 삼을 만큼 당시 자기에 대한 관심과 예술을 대하는 고려인들의 자세를 읽을 수 있다.


상감청자 명품으로는 다완, 탁잔, 매병, 병, 주전자, 유병과 합, 발, 화분, 베개, 도판 등이 있다. 이런 유물들을 보면, 일상용품 중에서 자기로 빚을 수 있는 제품들이 다양하다는 측면에서 고려는 자기의 나라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자기를 통해 높은 수준의 일상생활을 영위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비록 이런 제품들이 귀족들에게 한정된 영역이라는 것을 부정할 순 없겠지만 그렇다손 치더라도 높은 예술적 감식력을 지닌 고려인들의 예술혼에 대해서는 그 가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본다.


청자 표현 영역의 확산적인 측면에서 보면, 동화청자, 화금청자, 철채청자와 철유청자, 흑유청자, 백자, 철화청자, 연리무늬 자기를 통해 어떤 방식으로 표현의 양식이 세련되어졌는지 짐작할 수 있다. 원 간섭기의 실용적 청자로는 <청자상감운룡무늬편호>, <청자상감운학모란국화무늬매병>, <청자상감국화무늬병>, <청자상감포류수금무늬병> 등을 들 수 있다. 실용적 청자라고 해도 그 예술적 감각은 상감청자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고려 말기의 간지명 · 관서명 상감청자로는 <청자상감덕천명연꽃무늬매병>, <청자상감을유사온서명버들무늬매병>, <청자상감온명연꽃무늬편호>, <청자상감운학무늬병> 등을 들 수 있다.


고려청자의 종말은 분청자로의 이행으로 이어졌는데, 이는 왕조의 몰락과 운명을 같이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인 이유 때문이다. 고려 도자의 종말을 보여주는 유물로는 이성계 발원 백자 사리기를 들 수 있는데, 이 유물의 가치는 여말 선초의 시점에서 고려청자의 종말과 조선백자의 서막을 알려주는 유물로서 그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유물의 발견은 해저 유물에서도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는데 당시 배가 중요한 운송 수단으로 자리 잡았던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해저 유물 발굴 과정에서 수만 점의 고려청자를 인양하는 등 당시 유물을 발굴할 수 있었던 것은 고분출토에서 발굴되는 제한된 양의 유물과는 상대도 될 수 없을 만큼 양적, 다양성 측면에서 그 가치를 재조명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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