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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과 배신의 시대

정태헌 / 21세기북스

by 정작가


검은색을 배경으로 착시효과를 노리는 듯한 디자인을 한 책표지를 보면 마치 블랙홀 속으로 빠져들어간다는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실제로 우리는 수많은 역사를 직면하면서 착각 속에 빠지게 되는 경우가 많다. 한때 우민화 교육의 희생양이 된 것도 그런 폐해를 부채질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특히 근대의 역사라고 할 수 있는 20세기 격동의 역사를 훑어가다 보면 더욱 그런 느낌을 받게 된다.


<혁명과 배신의 시대>에는 6명의 역사적 인물이 등장한다. 한국의 대표주자로는 조소앙과 이광수, 중국은 루쉰과 왕징웨이, 일본은 후세 다쓰지와 도조 히데키가 그들이다. 이들은 각국에서 각기 사상의 대척점에 있던 인물들로 같은 시대를 살았으면서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역사적인 행로를 걸었던 사람들이다.


이 책을 지은 정태헌은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로 한국사연구회 회장, 역사문제연구소 소장, 남북역사학자협의회 이사장 등 다양한 역사 관련 단체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 근현대사를 주로 연구하는 교수답게 저서 또한 『일제의 경제정책과 조선사회』, 『한국의 식민지적 근대 성찰』, 『평화를 향한 근대주의 해체』 등의 저서가 눈에 띄기도 한다.


<혁명과 배신의 시대>는 아직도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근대 동아시아의 역사를 축소해 놓은 듯한 인상을 풍긴다. 그도 그럴 것이 수많은 역사적인 인물들 중에서 단 6명 만을 택해 한, 중, 일 삼국의 대표주자로 선발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것도 역사적인 평가가 엇갈리는 양극단의 인물들을 대비시켜 놓은 것이 이 책의 특징적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책 표지를 넘겨보면 ‘시대정신을 통해 본 20세기 한·중·일 사상사’라는 제하에 당시 시대상을 표현하는 단어들과 맞닥뜨리게 된다.


제국주의, 인종주의, 민족주의, 사회진화론, 자유와 평등, 문명화


이런 유의 단어들은 당대의 시대 상황을 비롯하여 이 시대의 한계를 더욱 극명하게 드러내주기도 한다. 가령 제국주의는 식민지 쟁탈 투쟁을 벌이던 열강들의 실태를, 인종주의는 히틀러의 등장과 세계대전으로 확장되는 비극의 서막을 에둘러 설명해 주기도 한다. 이 책에서 자주 언급되는 사회진화론은 더욱 근대 역사적인 비극의 단초가 되었던 이론의 위험성을 고찰할 수 있게 한다.


19세기 중반 영국의 사회학자 허버트 스펜서가 주장한 사회진화론은 찰스 다윈의 생물 진화론을 인간이 사는 사회에 투영해 만든, 침략을 합리화하는 정치적 개념이었다.


<혁명과 배신의 시대>는 단순히 6명의 역사적인 인물들에 대한 소개를 넘어 이들이 살았던 시대의 다양한 역사적 배경과 평가, 일화 등에 대해서도 아주 세세하게 다루고 있다. 이런 구성이 가능했던 이유는 책의 말미에 있는 방대한 양의 주석과 참고문헌의 목록만으로도 알 수 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 책을 읽다 보면 인물 사를 읽는 것이 아니라 근대 역사의 축소판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이 책에서 언급된 6명의 인물들은 비슷한 시기에 당대 선진적인 교육을 받고 몇몇은 일본 유학을 했던 공통점도 지니고 있다. 제국주의의 침탈과 군국주의 침략이 활개를 치던 분위기가 만연해 있던 시대를 살아가면서 맹목적으로 근대적인 ‘힘’과 ‘권력’을 추종하기도 했고, 일본을 제국의 몽상에 빠뜨린 사람도 있다. 그런 반면 사회진화론과 같은 당대 주류 이론에 편승하지 않고 독자적인 길을 택해 다음 세대에 희망을 전해주려고 한 이도 있다. 이들은 문학의 힘, 정치력 등을 활용해 새로운 길을 모색했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의 노력은 큰 빛을 보지는 못했다.


<혁명과 배신의 시대>는 불과 100년 전의 역사를 다루고 있지만 책을 읽다 보면 이것이 당대에서도 얼마든지 적용될 수 있는 텍스트라는 사실을 부정할 순 없을 것 같다. 현재에도 수많은 사상적 이론들과 미디어의 범위를 넘어서는 수많은 매체들을 통해 다양한 주장들을 접하게 된다. 오히려 너무나 다양한 이론들이 많아서 선택에 장애를 느낄 정도다. 하지만 똑같은 이론을 접하고서도 전혀 다른 길을 걸었던 이들처럼 오늘날 미디어에서 수없이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도 우리는 극명하게 갈리는 의식의 선택적 기로에 서있다.


사유의 가치를 일깨워주고 있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이 명저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비극으로 다가올 수 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책의 저자인 한나 아렌트가 강조하는 주장을 인용해 보면 이 말이 우리에게 처한 현실에서 어떤 작용을 일으키는지 짐작할 수 있다.


“타인의 고통을 헤아릴 줄 모르는 생각의 무능은 말하기의 무능을 그리고 행동의 무능을 낳는다.”


역사는 반복된다. 100년이 지난 현재 동아시아를 지배하고 있는 권력층의 면면을 보면 분명 그런 사실을 알 수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벌이고 있는 러시아 푸틴, 장기 종신 집권 체제를 구축한 시진핑, 3대 독재체제를 이어가고 있는 김정은, 패전 이후 한 번도 정권이 변한 적이 없는 일본의 권력 시스템을 보면 그나마 한국이 자유롭고 민주적인 형태의 선진적인 시스템 기반 하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혁명과 배신의 시대>에서 다루고 있는 인물들의 엇갈린 행보가 훗날 역사의 조명을 받았던 것처럼 우리 또한 현 세태에 주어진 상황을 면밀하게 파악하여 그에 맞갖은 행보를 이어가는 것이 후손들의 미래를 위한 값진 선물이 되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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