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 캐럴 / 인디고
일장춘몽을 사전적 정의로 표현하면 ‘한바탕의 봄꿈처럼 헛된 영화나 덧없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그런 영화의 헛됨을 표현한 작품은 아니지만 앨리스가 꿈꾼 세계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허무한 결말을 내포하고 있는 한계를 가진 소설이다.
주인공인 앨리스가 분홍색 흰 토끼를 보고 현실과는 전혀 다른 세상 속으로 가는 장면은 현실과 꿈의 중간 지대를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시작된 ‘이상한 나라’의 탐험은 그야말로 예측불허의 상황으로 전개된다. 동물과 말을 하는 것은 기본이다. 키가 작아졌다 커지기도 하고, 흔히 갖고 놀던 카드는 병사가 되어 여왕을 호위하는 무사로 새로 정체성이 규정되기도 한다. 비논리적인 대화는 어떤 상황에서도 사형을 남발하는 여왕의 호통에서 극에 달한다. 마치 의식의 흐름을 풀어내는 듯한 기법처럼 장면이 흐르기도 한다. 오히려 그런 사건 전개에 무리수를 두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낯설게 하기의 기법을 차용한 듯 신선하게 느껴지는 측면도 있다.
소설은 현실을 반영한다는 측면에서 다소 무리수를 두어도 독자가 이해할 수 있고, 우화는 과장된 풍자를 통해 빛이 나듯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사건 관계에 대한 연관성이 현저히 저하된 상태에서도 도리어 작품의 질을 높여주는 다양한 장치를 통해 독자들로 하여금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하는데 일조하고 있다. 이것은 작가가 의도한 것일 수도 있겠고, 그렇지 않으면 독자로서 몰이해에 근거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여하튼 상상력의 극단을 달리는 작가의 창조적 행위에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작품에 등장하는 수많은 등장인물들의 말과 행위는 논리적인 견지에서 해석하기엔 부적당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것은 작가가 의도한 것 일수도 있겠지만 과연 무엇 때문에 예측할 수 없는 대사와 행동들을 배치해 놓은 것인지 궁금한 것은 사실이다. 혼돈스러운 상황을 그대로 표현한 것인지 그 속에서 함축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런 의문에 답할 수 있다면 제대로 이 작품을 이해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보여주는 인물들의 불가측성은 독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인물 유형에 대한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창조적인 인물을 탄생시킨 공과를 작가에 돌리는 것도 무리수는 아닐 터이다. 어찌 보면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이해하기 힘든 인물들의 등장으로 가져오는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전략이었다면 조금이나마 그런 의도를 이해할 수 있는 여지는 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이 작품을 정상적으로 이해하고 논리적으로 설명하는데 다소 한계가 있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생기는 것이다.
새로운 세계를 향해 나아간다는 것은 어느 정도의 두려움과 공포, 망설임을 동반한다. 하지만 주인공인 앨리스는 주저함이 없이 그런 세계에 아낌없이 자신을 던진다. 어떤 의문이나 논리적인 결과를 따지기보다 직관적인 방식의 접근을 통해 자신의 운명을 맡기는데 거부감이 없는 것이다. 단 한 가지라도 손해를 보면 마치 무슨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세태 속에서, 논리적인 계산이 필수품처럼 자리 잡고 있는 현실을 보면 앨리스의 처연한 태도가 더욱 나 자신을 부끄럽게 만든다는 느낌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