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문학 독서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

J. M. 데 바스콘 셀스 / 동녘

by 정작가


철이 든다는 것은 어쩌면 세속에 물들어간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고, 세상의 이치를 알아간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그 해석이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간에 여하튼 철이 든다는 것은 제 나이에 맞는 행동을 한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그런 견해를 뒤집는 아이가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제제가 그렇다. 제제는 제 나이에 맞는 정도가 아니라 그 수준을 넘어서 때론 교훈을 주기까지 한다. 역설적인 것은 그런 제제를 어른들은 툭하면 때린다는 것이다. 어린 제제에게 장난은, 특히 심한 장난은 어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할 정도지만 그건 여전히 제제에게 걸맞은 행동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제제가 심한 장난을 한다고 해서 철없는 아이라고 할 이유는 없어질 수밖에 없다. 쉽게 철들어 버린 아이. 왜 제제는 그렇게 철이 들 수밖에 없었을까?


그것은 바로 제제가 너무 일찍 슬픔의 정서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나무 친구인 라임오렌지나무는 곧잘 제제와 대화를 나눈다. 종이 다른 것을 떠나 동식물 간에 대화를 나눈다는 설정은 다소 동화적인 요소를 담고 있지만 제제의 성숙된 인식의 가치에 비춰본다면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이해될 수 있는 여지가 크다. 다섯 살 짜리라고는 볼 수 없는 세상에 대한 인식의 깊이는 수많은 물음을 양산한다. 그런 물음과 현실적인 괴리에서 오는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제제에게 있어선 장난일 수밖에 없다. 마치 아기가 자신의 표현 수단을 울음으로 한정할 수밖에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니 간헐적으로 제제가 뱉어내는 욕은 완전한 이해를 기반으로 한 어른들의 그것과는 다르다. 어른들이 무자비하게 제제에게 린치를 가하는 것은 바로 어른의 관점에서 아이를 바라보는 몰이해에 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그러기에 제제는 슬프다.


라임오렌지나무의 이름은 밍기뉴다. 제제가 기분 좋을 때 부르는 이름은 슈르르까다. 슈르르까도 그런 자신의 이름을 부를 때 더욱 신나 한다. 시가 생각난다. 김춘수의 ‘꽃’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 그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는 구절처럼 제제로 인한 밍기뉴는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는 것이다. 세상에 물들지 않아서 아직은 규정되지 않은 채 살아갈 수밖에 없지만 여전히 세속에 찌든 어른 세계에서는 그런 것들이 용납되지 않는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몰라도 제제의 장난은 더욱 심해지고, 욕도 험해진다. 그 의미를 제대로 아는지 모르는지.


이 소설은 널리 회자되는 작품이지만 단순하게 낭만적으로 읽히지는 않는다. 제제의 모습에서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아동 폭력의 실체를 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장난이 심하다는 이유로 가족들로부터 냉대를 받는 제제가 보잘것없는 나무 한 그루를 벗 삼아 아픈 정서를 치유받고자 하는 것은 슬픈 현실을 더욱 애잔한 느낌으로 몰아간다. 마지막 고백에서 사랑을 가르쳐 준 뽀르뚜까 아저씨에 대해 술회하는 대목에서 작가는 제제의 입을 통해 ‘사랑 없는 삶은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왜 아이들은 철이 들어가야 하나요?’라고 묻는 나이 든 제제의 물음에서 어릴 적 가지고 있던 슬픔의 정서가 잔뜩 배어 나오는 느낌이 든다. 어린아이와 식물과의 정서적인 교감을 아름다운 필치로 풀어낸 작가의 따뜻한 마음이 배어있는 그런 작품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이상한 나라의 앨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