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덕 감독(2005) / 대한민국
푸른 바다에 펼쳐지는 광활함은 온데간데없고, 바다 한 편에 자리한 한 척의 배가 이 영화의 유일한 입체적인 공간으로 자리한다. 영화의 시작부터 울리는 현악기 소리는 한국 고유의 정서인 한을 그대로 함축시켜 놓은 것처럼 구슬프게 들린다. 음악을 듣다 보면 영화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배는 이 영화의 주인공인 노인과 소녀의 유일한 생활공간이다. 노인은 가끔씩 다른 한 척의 배로 세상과 소통을 하지만 소녀는 이곳이 그녀가 향유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셈이다. 노인은 배를 몰고 가서 낚시꾼들을 모아 온다. 소녀는 잔심부름을 하며 손님들을 돕고 있다. 이런 상황은 여지없이 낚시꾼들로 하여금 소녀에게 치근덕거림을 가하게 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이 영화의 상징적인 매개체인 활은 여러 가지 용도로 쓰인다. 그중 첫 번째는 소녀에게 추파를 던지거나 추태를 부리려는 낚시꾼들에게 공포감을 심어주기 위한 용도로 활용된다. 총으로 치면 일종의 공포탄인 셈이다. 두 번째는 악기로 활용된다. 고독한 뱃전에 울려 퍼지는 현악기의 울림은 노인과 소녀의 정서를 반영하듯 구슬프고 애잔하기까지 하다. 세 번째는 손님들을 위한 점 보기 일환으로 활용된다. 일종의 활 점인 셈이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낚시꾼들에게 경고를 하기 위한 용도로서의 활이다. 이 활은 아직은 견고하게 맺어지지 않은 노인과 소녀와의 관계를 지키고, 타인으로부터 소녀를 보호하기 위한 용도로 활용된다. 이는 비록 같은 공간인 배 안에 있지만 엄연히 다른 두 공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노인이 구획한 이 공간을 침범한다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다. 만일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여지없이 노인의 화살이 심장을 뚫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토록 노인이 활까지 동원하며 소녀를 지키려고 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소녀와 예정된 혼례를 치르기 위함이다. 소녀가 열일곱 살이 되는 날에 맞춰 거행될 혼례식은 노인의 가장 큰 희망이자 꿈이요, 삶의 목적인 셈이다. 노인이 하루를 보내며 달력에 동그라미를 치는 이유도 다가올 시간을 기다리는 애틋함이 묻어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견고하게 구축된 틀을 깨는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젊은 남자의 출현이다. 젊은이의 출현은 노인에겐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일 수밖에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워크맨이라는 상징적인 문명의 이기를 통해 소녀는 귀로 듣는 음악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고, 그것은 노인과의 사이를 벌려놓는 매개체로서 충분한 역할을 수행할 만큼 강력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계기로 소녀는 어릴 때 미아가 되어 지금까지 노인과 함께 해 온 시간을 전복당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봉착하게 된다. 젊은이는 노인을 유괴범으로 전락시켰고, 머지않아 소녀는 배를 벗어나 육지로 향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노인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생을 마감할 것을 결심한다. 다행히 그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지만 그로 인해 노인은 다시 소녀를 얻게 되었다.
시간은 흐르고 노인과 소녀는 혼례식을 치른다. 둘 만의 오붓한 여행. 바다로 떠나는 신혼여행은 노인과 소녀의 마지막 이별여행이 될 수밖에 없다. 현실적인 상황을 거부할 수 없었던 노인은 자신의 생명 같은 바다에 몸을 던진다. 중요한 것은 그 이후의 일이다. 바다의 햇살을 받으며 누워있던 소녀는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하게 된다. 마치 귀신을 접신한 것처럼 보이는 소녀의 행동은 노인과의 합일을 위한 바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절정의 시간이 끝나고 배는 물속으로 침몰한다. 마치 제 할 일을 다 마쳤다는 듯이.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보면 하나같이 이미지가 음울하다. 감독의 성장배경이 영향을 끼친 것인지는 모르지만 색조로 표현하자면 잿빛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염세적인 성향이 강하다. 이 영화 <활> 또한 마찬가지다. 더군다나 배경음악이 되는 현악기의 울림은 청각적인 이미지까지 염세적으로 물들이는 듯하다. 이는 삶의 모습이 보편적으로 장밋빛처럼 환상적인 빛깔이 아니라는 감독의 인식이 영화에 반영된 듯하다.
<활>은 지고지순한 사랑을 갈망하는 한 노인의 바람이 현실의 벽에 부딪치면서 깨져가는 과정을 뛰어난 심리묘사를 통해 보여준 작품이다. 아직도 귓가에는 현악기의 애잔한 선율이 흐른다. 또한 시원(始原)의 바다로 돌아간 노인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