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덕 감독(1964) / 대한민국
EBS TV를 통해 본 흑백 영화이다. 실제 부부이며, 한때 충무로를 주름잡았던 명배우들의 열연을 보는 재미가 솔솔 하다. 또한 그 시절의 사회 배경을 살펴보는 것도 색다른 재미가 있다.
영화 속에서 남자주인공은 가정 형편이 어려운 반면 여자주인공은 상류층의 자제로 나온다. 이들이 처음 맞닥뜨리게 되는 장면에서는 그런 사회 계층상의 차이를 확연하게 드러내준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여주인공과 친구들이 빈민촌의 아이들에게 선물을 선사한다. 그들은 트럭 위에서 선물을 나누어주고, 남자 주인공이 사는 동네의 아이들은 선물을 받으려고 트럭 주위를 맴돈다. 그러기에 선물을 받으려다 넘어진 아이의 모습을 보고, 남자주인공은 노발대발한다.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하려는 사회 상류층의 단면을 지적하는 남자주인공은 마치 빈민층을 대표하는 투사 같다.
이들의 만남은 우연히 대학축제에 이루어진다. 가면무도회에서는 그들은 신분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파트너가 된다. 계층이 다른 남녀가 맺어질 수 있는 것은 제비 뽑기에서만 가능하다. 이건 역설적으로 보면 우연 없이는 절대 그런 만남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러기에 사랑은 한때의 추억을 만들 수 있을지언정 지속적인 삶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여주인공은 눈물을 흘리며, 빈한한 살림살이에도 여전히 행복하다고 하지만 그것은 누가 보기에도 행복하지 않은 상황임을 알 수 있다. 이들의 비극은 비록 우연치 않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그 밑바닥에는 계층을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한다. 그것은 태생적인 한계이자 현실적인 사회 계층 간의 문제인 것이다. 여주인공이 죽고, 남자주인공은 자기 딸조차도 데려갈 수 없는 입장에 처해있다. 물론 남자로 인해서 여자가 죽은 것은 사실이지만, 혈연조차도 계층 간의 갈등을 쉽게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 그러니 남자주인공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고등고시에 합격해야 할 당위성이 생긴 것이고, 비로소 그때서야 자기 자식을 돌려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짚신도 짝이 있다는 말이 있다. 이런 말에는 다분히 사회 계층과 관련된 문제의식이 내포되어 있다. 짚신이 결코 비단신과의 연을 맺기는 어려운 법이다. '떠날 때는 말없이'라는 영화 제목처럼 분에 넘치는 사랑을 희구하는 자여, 그대는 그냥 말없이 떠나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억울하고, 슬플지라도 세상은 그런 사랑을 용납하지 않는다. 보이는 패 앞에서 눈 감아줄 리 없는 세상의 냉혹함을 탓하지 말고, 세상의 주류가 되는 것이 유일하게 우뚝 설 수 있는 길임을 사무치게 느꼈던 슬픈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