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은 일종의 운명이었다. 태어난 이후로 주어지는 자연스러운 인생의 행로처럼 그렇게 시작된. 그렇다고 가난을 혐오하거나 몸서리치게 저주한 적은 없었다. 가난 또한 당시에는 일상적인 풍경이었기에. 무엇이든 남들과 비슷한 느낌을 공유할 때는 큰 반향이 없다. 가난도 그랬다. 모두들 그랬으니 당연한 것이라고. 단지 경중의 차이만 있었을 뿐. 근데 그게 문제였다. 웬만큼 가난은 용인하겠는데 너무 가난했다. 대한민국 1%였다고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더 힘들게 사는 사람을 보지 못해서 한 판단일 수도 있다. 하지만 동네에서 거의 유일하게 자리했던 초가집. 그 초가집조차 소위 변소도 없고 땅도 우리 것이 아니라면 할 말 다했다. 거기에 가끔씩 돼지사료로 주어지던 것들을 음식으로 먹을 때면, 그야말로 밑에서 대한민국 1%라고 해도 허풍은 아니었을 것이다. 1950년대, 1960년대 얘기가 아니다. 1980년대를 그렇게 살았다는 것이 문제다. 그나마 위안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은 양친 모두 부재하지 않았다는 것 정도. 하긴 부모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복은 복이었다. 하지만 가난은 그런 가정 구성원의 부재가 아닌 재정의 상태를 의미하기에 부모의 존재여부와 가난을 병치시키는 것은 약간은 부자연스러운 비교라고도 할 수 있겠다.
생활비 또한 국가로부터 보조를 받았다. 소위 생활보호대상자라고 하는 주홍글씨를 달고 살았다고 해도 틀린 표현은 아니다. 요즘은 그 용어가 순화되어 기초생활수급자로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그런 용어의 변동이 본질을 흐리게 하지는 않는다. 요즘은 민생지원금을 줄 때도 한 지자체에서 색깔을 달리하는 바람에 논란이 될 정도로 인권에 대한 감수성이 높지만 그땐 그러지 못했다. 유튜브에서 한 유명한 일타강사 또한 과거의 가난으로 인해 겪었던 경험을 토로한 적이 있다. 급식도시락의 색깔로 일반 학생들과 구별 짓기 하던 그 살풍경한 현실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 그 심정이 조금은 이해가 간다. 실제로 불우이웃 돕기의 대상자가 되어 반 친구들이 한 움큼씩 가져와 모인 쌀을 마치 산타할아버지가 선물을 짊어지듯 지고 나갔던 그 기억들은 고스란히 상처로 각인된다. 누나 또한 전 학생이 쳐다보는데서 불우이웃 돕기 학생으로 선발되어 포스터물감을 공개적으로 받았던 경험이 있었다고 했다. 공개적으로 주홍글씨가 새겨지던 그 순간의 황망함을 어떻게 견디어냈을까? 수만 톨의 하얀 쌀이 검은 모래알처럼 느껴지던 그 기행의 순간들이 기억의 파편 속에 넘실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