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게임

윤인호 감독(2007) / 대한 민

by 정작가

남녀노소, 게임을 싫어하는 계층은 없다. 단지 방식이 다를 뿐 인간은 본능적으로 유희를 즐긴다. <더 게임>은 이런 게임의 영역을 확장시켜 인간의 운명을 건 도박 수준으로 게임의 범위를 넓혀간다.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돈뭉치. 달랑가진 것이라고는 몸뚱이가 전부인 젊은 길거리 화가. 인간의 욕망을 상징하는 이 돈다발은 말 그대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한 젊은이의 운명을 바꿔 놓는다. 단 한 번의 게임으로 한쪽은 젊음을 얻고, 한쪽은 젊음을 잃는다. 게임의 속성은 늘 제로섬이다. 양쪽을 충족시킬 수 있는 방법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게임의 룰이다. 영화 속의 한 사람이 반문한다. 일부와 전부를 건다는 것은 불공정한 게임이라고. 그렇다. 산더미 같은 돈다발과 젊음 자체는 애초부터 거래가 될 수 없는 대상이다. 하지만 돈의 힘은 생각보다 강렬하다.


게임이 되지 않는 게임을 시작하는 것은 늘 가진 자의 몫이다. 그들에게 게임은 그저 게임일 뿐이지만, 약자에게 게임은 자신을 전부 걸어야 하는 운명과도 같은 것이다. 결국 게임을 즐기는 이들은 평범함을 거부한다. 누추함을 경멸한다. 마치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처럼 말도 안 되는 출발 선상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이 약자들의 운명이다. 이런 경우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명문가와 빈민가. 이런 극단적인 구분이 아니더라도 이미 우리는 많은 부분 정의가 훼손된 사회에서 불공정한 게임을 해야만 하는 운명 속에 살고 있다. 그것은 거부한다고 해서 거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애초부터 약자에게는 거부할 자격조차 없다.


<더 게임>의 젊은 화가는 자신이 처한 재정적인 현실의 궁핍 때문에 결국 게임을 택한 것은 그의 몰상식한 판단 때문이 아닌, 그를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사회 체제 때문이라는 것을 본인조차 인지하지 못한다. 더구나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탐욕적인 갑부는 함부로 게임을 하지 말라고 충고까지 한다. 게임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놓고, 게임을 하지 말라니. 하지만 이 영화에서 반전은 이런 현실의 답답함을 조금이나마 해소해 준다. 게임은 가진 자들만의 축제는 아니라고. 누구든지 게임을 할 수는 있다. 조금은 불리할 수도 있고, 위험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게임에서조차 승리할 수 없다면 약한 자들은 살아남기조차 어려운 세상이다. 물론 이런 게임에 참여할 수 있는 자체를 부여해 줄 수 있는 현실의 가능성은 거의 제로다.


우린 주어진 운명 속에서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려 그저 조종당하다 사라질 뿐이다. 이 영화에서는 그런 인간군상들의 추악한 부분을 적나라게 드러낸다. 다른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이런 저들의 속내를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것만으로도 <더 게임>은 진정한 게임이 없는 이 사회에 희망을 불어넣어 주는 작은 불씨여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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