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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지켜낸다는 것

팡차오후이 / 위즈덤하우스

by 정작가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말이 있다. 세상을 평정하기에 앞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수신(修身)이라는 것인데 가훈으로 삼아도 좋을 만큼 보편적으로 널리 알려진 말이다. <나를 지켜낸다는 것>은 수신(修身)과는 조금 차이가 있지만 비슷한 의미로 새길 수 있다. ‘나를 지켜낸다는 것’은 곧 ‘나를 닦는다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요즘과 같은 복잡한 세상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다는 것은 쉽지 않다. 직장인, 자영업자 할 것 없이 그저 자신을 죽이고 순응하며 살아가는 일들이 보편적인 처세술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 주체적인 삶을 버리고 종적인 삶에 안주하며 살아갈 것인가 하는 물음에서 회피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유한한 인생을 살아가는 이상, 자기 주체성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좀 힘들더라도 주체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이끌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나를 지켜낸다는 것>은 ‘칭화대 10년 연속 최고의 명강, 수신의 길’이라는 부제로 알 수 있듯이 중국 칭화대의 유명 강의를 엮어놓은 책이다. 요즘 중국도 자본주의 물결의 파고로 인해 흔들리는 대중의 모습들을 매스컴에서 종종 접할 수 있다. 경제, 문화의 간극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세태에서 자기 수신을 위한 길은 어쩌면 필수불가결한 요소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과연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과도기를 겪고 있는 중국대륙 최고의 인문 강의에서 우리가 유추해 낼 수 있는 것들을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거대한 시대의 흐름을 읽기에 앞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수련의 시간을 가져야 하는 당위성을 일깨워주는 것이라고 진단할 수도 있다. 그렇게 이 책에서는 자기 수련을 위한 9가지 길을 제시한다. 그 방법들이라고 하는 것이 그리 익숙한 것들은 아니다. 아니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체계적으로 분류해놓지 못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 적확한 표현이다. 수정, 존양, 자성, 정성, 치심, 신독, 주경, 근언, 치성이라는 단어를 접하다 보면 낯선 느낌에 사로잡히게 된다. 한자 없이는 그 뜻을 해독하기도 쉽지 않다. 설사 한자를 알고 있더라도 정확한 뜻을 풀이한다는 것은 어렵게 느껴진다. 그렇다면 ‘우리가 추구해야 할 평생의 숙제’라고 정의해 놓은 수신(修身)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덕목들을 짚어보고 충실히 수행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수신을 위해 첫 번째로 제시한 덕목은 수정(守靜)이다.‘고요히 앉아 마음을 들여다보는 힘’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 덕목을 가장 우선순위에 내세운 것은 내 마음의 상태를 알아야 진단을 하고 그에 맞갖은 답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저자의 인식 때문이 아닐까 싶다. 고요함 속에서 마음의 평정을 찾고,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되면 내 안에 있는 문제점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을 위해 정좌(正坐)라는 ‘안으로 힘을 쏟는 영혼의 노동’이라는 행위에 익숙해지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외에도 존양(存養-마음을 살펴 하늘의 뜻을 찾는 힘이다), 자성(自省-패러다임을 깨고 한계를 허무는 힘이다), 정성(定性-고난의 압박에서 자신을 지키는 힘이다), 치심(治心-양심을 지켜 자유를 누리는 힘이다), 신독(愼獨-철저하게 자신과 마주하는 힘이다), 주경(主敬-나라는 생명을 사랑하는 힘이다), 근언(謹言-언행을 삼가 군자에 이르는 힘이다), 치성(致誠-지극한 정성으로 자신을 완성하는 힘이다)이라는 덕목들이 있다. 이 덕목들을 모두 이해하고 실천한다는 것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들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덕목들을 온전히 나의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과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는 것과는 분명히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개인적으로 늦게나마 깨달은 것들 중에 몇 가지가 있는데, 바로 정성, 신독, 주경, 근언 정도가 되겠다. 이런 덕목들은 인생에서 숱한 시행착오를 거치며 비로소 깨달은 것들이다. 그러니 그 가치를 따진다는 것이 쉽지 않다. 이 책을 두 번 읽고도 다시 읽고 뜻을 새기려고 하는 것은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덕목들만 충실히 수행한다고 하더라도 자기 수양에 소홀하지 않을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동안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많았다. 그것은 이 책이 중국에서 출간된 이유도 있을 것이다. 또한 《논어》, 《맹자》 같은 중국 사서를 제대로 읽지 못한 이유로 개인적인 교양의 단계가 책의 수준에 부합되지 못한 측면이 있는 것도 부정할 순 없다. 그런 부족함을 깨달을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이 책을 대하는 최소한 예의는 갖춘 것이 아닐까 싶다. 몇 번 더 책을 읽고도 이해할 수 있는 지경이 아니라면 이해가 될 수 있을 때까지 언제까지라도 읽고 싶은 책이다. 그만큼 수신(修身)이라는 것은 ‘나를 지켜낸다는 것’으로서 가장 큰 의미가 있는 과업일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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