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 / 창비
시집 『별들은 따뜻하다』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등의 작품으로 알게 된 시인을 『슬픔이 택배로 왔다』는 시집으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코로나19로 인해 비대면문화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에게 배달은 이 시기를 상징하는 아이콘처럼 자리 잡았다. 이 시집의 제목처럼 그런 현 상황에 빗대어 슬픔이라는 정서를 택배로 치환시킨 작가의 예리한 시선은 시를 통해 당대 현실 반영이라는 과업을 고독하게 수행하는 시인에게 있어서는 가장 시의적절한 접근이었다.
슬픔이 택배로 왔다
누가 보냈는지 모른다
보낸 사람 이름도 주소도 적혀 있지 않다
서둘러 슬픔의 박스와 포장지를 벗긴다
벗겨도 벗겨도 슬픔은 나오지 않는다
누가 보낸 슬픔의 제품이길래
얼마나 아름다운 슬픔이길래
사랑을 잃고 두 눈이 멀어
겨우 밥이나 먹고 사는 나에게 배송돼 왔나
포장된 슬픔은 나를 슬프게 한다
살아갈 날보다 죽어갈 날이 더 많은 나에게
택배로 온 슬픔이여
슬픔의 포장지를 스스로 벗고
일생에 단 한번이라도 나에게만은
슬픔의 진실된 얼굴을 보여다오
마지막 한방울 눈물이 남을 때까지
얼어붙은 슬픔을 택배로 보내고
누가 저 눈길 위에서 울고 있는지
그를 찾아 눈길을 걸어가야 한다
- 「택배」 전문
이 시에 나타난 정서를 보면 현대의 특징 중 하나인 익명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온라인 공간에서의 익명성 테러는 자신을 떳떳하게 공개하기를 꺼려하는 사회 속성을 반영하는 병폐 중 하나다. 그러기에 시인은 “슬픔의 포장지를 스스로 벗고 일생에 단 한 번이라도 나에게만은 슬픔의 진실된 얼굴을 보여다오”하며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내라고 하는 것이다. 시인의 이런 바람은 비단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누가 저 눈길 위에서 울고 있는지 그를 찾아 눈길을 걸어가야 한다”라고 말하며 적극적으로 도와줄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라고 하는 것이다. 시인의 이런 정서는 시집의 곳곳에서 빛을 발한다. 「별의 꿈」 「프란치스코의 집」 「희생양」 「바보가 바보에게」 「바보가 되기 위하여」는 가톨릭이라는 종교의 냄새를 풍기기도 하지만 이런 시들을 통해 이웃사랑 실천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이태석 신부가 언급되는 「별의 꿈」, 김수환 추기경의 잠언집 제목을 차용한 「바보가 바보에게」라는 시는 특정인의 행적을 통해 암묵적으로 이들 삶에 대한 동경과 본보기를 제시한다.
이 시집은 비단 위에서처럼 교훈적인 메시지만 담고 있지는 않다. 누구라도 한 번쯤 정한의 정서를 떠올릴 어머니에 대한 내용을 소재로 한 시도 눈에 띈다. 「녹명」 「문신」 「진흙」 「회초리꽃」 「걸레의 마음」 「어머니에 대한 후회」 등이 그런 시들이다. 「녹명」에서는 골목에서 뛰놀던 시절 어머니의 환영이 청각적인 감각으로 입혀지는 상황을 경험하게 되며, 「문신」은 새의 모습에서 시각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어머니의 환영을 체험하게 된다. 「진흙」에서는 일상의 순간마다 마주하게 되는 어머니와의 조우를 실감 나게 그려낸다. 「회초리꽃」에서 느껴지는 정서는 사랑의 매로서 다가오는 어머니의 회초리에 대한 의미를 되새긴다. 「걸레의 마음」에서는 희생의 삶을 살아온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잔뜩 배어난다. 「어머니에 대한 후회」라는 시에서는 어머니의 임종을 앞두고 있던 상황에서 시의 화자가 메일을 보내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임종을 맞이한 안타까운 상황을 현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이들 시들에서는 하나같이 안타까움, 아쉬움, 회환, 그리움 등의 정서가 느껴진다.
이 시집에서는 시의 제목처럼 슬픔의 정서가 곳곳에서 드러난다. 특히 떨어짐, 낙(落)의 미학은 시집 전반부를 지배하는 감각으로 자리 잡고 있다. 떨어짐은 과일의 떨어짐 「낙과」, 곡식의 떨어짐 「낙곡」, 물의 떨어짐 「낙수」로 점진적으로 심연의 깊이를 더해간다. 이뿐만이 아니다. 돌의 떨어짐 「낙석」, 마음의 떨어짐 「낙심」, 떨어지는 법인 「낙법」으로까지 확대되어 간다. 이 정도면 떨어질 수 있는 것들은 죄다 모아놓은 셈이다. 이런 떨어짐은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영역으로 의미를 확장해 간다. 「낙과」에서는 직접적으로 과일에 대한 언급이 없지만 햇빛, 바람, 폭풍우 등의 자연환경을 드러냄으로써 그 존재감을 드러낸다. 「낙곡」에서는 곡식과 이를 재배하는 인간에 대한 속성이 주를 이룬다. 「낙수」에서는 우리가 자연스럽게 떠올리는 폭포나 파도의 이미지를 벗어나 ‘아버지 앞에 떨구는 내 참회의 때늦은 눈물’로서 낙수가 자리한다. 「낙심」에서는 「낙과」에서 드러나는 과일의 낙하와 「낙수」에서 언급되는 가족의 심상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낙법」에서는 그동안 슬픔의 원천으로 자리했던 ‘떨어짐’이 삶을 위한 당당한 ‘받아들임’으로 간주된다. 기왕 떨어질 운명에 처한 삶이라면 ‘떨어지는 법’을 통해 현실을 직시하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슬픔의 정서에서 죽음은 필연적으로 다가온다. 그런 죽음은 자의든 타의든 사회와 시대에 생채기를 낸다. 현재에 직면한 부조리한 현실은 과거로부터 이어지고, 그것은 미래로 이어질 수 있는 지속성을 가능케 한다. 그런 측면에서 「자살 혹은 타살」은 누군가의 죽음이 정확히 규정될 수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음을 역설한다. 「나에게 하는 질문」에서 되뇌던 과거의 기억들과 「나는 납치되었다」는 일정한 틀 속에 복속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대인들의 체념적인 운명을 서술한다.
이 시집에서 주를 이루는 정서는 슬픔이지만 시인은 슬픔만으로 이야기를 끝내지 않는다. 떨어짐의 슬픔을 낙법으로 치환해 내듯이 다가오는 슬픔을 거부하지 않는다. 「발버둥」에서는 그런 시인의 결연한 의지가 도드라지게 나타난다.
발버둥 치지 않겠습니다
초등학생 때 포항 송도 앞바다에 빠졌을 때처럼
더이상 발버둥 치지 않겠습니다.
「마침기도」 「용서에 관한 단상」 「마지막 기도」 「나의 소원」 등에서 보이는 시인의 화법은 슬픔의 근원적 해결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이에 대한 생각과 화해의 시도를 통해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한다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 시집의 맨 마지막 장에 수록된 「새해의 기도」는 그런 측면에서 시인이 가지고 있던 슬픔이 어떤 식으로 체화될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올해도 저를 고통의 방법으로 사랑해주세요
저를 사랑하시는 방법이 고통의 방법이라는 것을
결코 잊지 않도록 해주세요
그렇지만 올해도 견딜 수 없는 고통은 허락하지 마소서
올해도 저를 쓰러뜨려주세요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쓰러뜨리신다는 것을 이제 아오니
올해도 저를 거침없이 쓰러뜨려주세요
그렇지만 다시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쓰러뜨리지는 말아주소서
올해도 저를 분노에 떨지 않게 해주세요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해도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분노하기보다
기도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세요
그렇지만 분노를 가라앉힐 수 없을 정도로
억울한 일은 당하지 않게 하소서
올해도 저에게 상처 준 자들을 용서하게 해주세요
용서할 수 없어도 미워하지는 않게 해주세요
그렇지만 용서할 수 없을 정도로 상처받지 않게 해주소서
무엇보다 저 자신을 용서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 「새해의 기도」 전문
이 시에서 볼 수 있는 시인의 태도는 무조건적인 수용이 아니다. 슬픔에 직면해 고통을 받을 수도 있고, 때론 쓰러질 수도 있으며 분노에 떨고 상처 준 자들을 용서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것들을 모두 수용하기에는 인간으로서 당연한 한계성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고통도 ‘견딜 수 없는 고통’은 허락할 수 없는 것이고, 쓰러지더라도 다시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무력해지는 스스로를 인정할 수는 더더욱 없는 것이다. 상처 준 자들을 용서할 수 없어도 미워하지는 않게 해 달라는 기도는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가능한 일을 하라는 시인의 생각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고로 시인은 “무엇보다 저 자신을 용서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라고 간언 하는 것이다.
정호승 시인의 신작 『슬픔이 택배로 왔다』는 코로나19를 거치면서 우리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택배’라는 상징물을 통해 무기명으로 배달된 슬픔의 행로가 어떻게 인간의 삶 속에서 자리하게 되는지 명징하게 보여준다. 때로는 과거의 기억을 통해서 또는 사회에 만연된 부조리의 근원을 파헤치기도 한다. 이런 슬픔이 자리하게 되는 근원적인 치유를 때론 종교적인 힘에 의탁하기도 한다. 또한 떨어짐이라는 자연 현상 속에서 자리한 내적 기억의 회고를 통해 내면에 잠들어있던 지난 추억들을 소환하기도 한다. 하지만 여전히 인간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근원적인 슬픔은 인간 스스로 해결할 수도 없음을 인정한다. 그렇다고 그것이 오로지 절대자에 대한 기도와 간구만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던지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인간의 삶 속에 자리한 슬픔을 결국 내적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자기 구원도 가능하다고 역설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