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의 첫 시작은 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학주 앞에 놓인 생사초가 보인다. 음산한 배경과 흔들리는 여러 개의 촛불은 불안한 정조를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지도 위를 훑고 지나가는 카메라의 이동 속도는 빠르다. 마치 무언가를 잠식하기라도 하듯. 지도 위에는 왜군과 조선군의 대치 상황이 표현되어 있다. 그 위로 생사 초가 종이장 위에 놓여있다.
“이것이 죽은 이를 되살린다는, 그 풀인가?”
“예. 그러하옵니다. 이 풀의 진액을 침에 묻혀 죽은 자의 인당혈에 꽂으면 산 사람의 피와 살을 탐하는 괴물로 되살아나는데 단 천곡이 상하거나 죽은 뒤 시간이 지나 부패가 시작된 자는 되살릴 수 없습니다.”
펼쳐진 군영의 풍경. 카메라는 조학주의 발걸음을 좇아간다. 음산한 음악에 까마귀 소리가 들린다. 귀에 거슬리는 음악. 호패를 모으는 장면은 불길한 죽음을 예고한다. 무심히 호패를 보고 있는 안현 대감의 수하. 조학주와 마주치게 된 안현. 그들 사이에 침묵이 흐른다. 마치 아무 말하지 않고도 뭔가를 알 수 있다는 듯이. 까마귀 몇 마리가 앉아있다. 화면이 확장되면 수십 구의 주검이 드러난다. 횃불 사이로 더욱 쓸쓸함을 더하는 무덤은 현실의 비극성을 더욱 심화시킨다. 강렬하게 들려오는 까마귀 소리. 고조되는 음악. 해가 막 넘어간 어두운 밤하늘을 수놓는 까마귀 떼의 출현은 비극의 서막을 암시한다. 마치 히치콕의 영화 <새>를 보는 듯하다.
좀비들과 대치한 세자 일행. 아침 안개를 뚫고 엄청난 속도로 달려드는 좀비 떼들에 세자 진영에서는 긴장감이 감돈다.
“저들이 어떻게 낮에”
좀비들의 변성을 암시하는 무영의 이 말은 후에 서비의 진술로도 이어진다. 의녀로서 그의 역할은 이제 극에서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조연급 캐릭터의 역할 변화는 ‘진술’의 관점에서 서비를 적극 활용하는 모양새다. 첫 장면에서 의원이 말했던 생사초는 서비의 입을 빌어 재발화된다. 이는 조학주에게 설명하는 장면에서 더욱 구체화된다.
원거리에서 좀비 떼들이 쫓아오는 장면은 다각도로 거리와 시선, 방향이 분산된다. 이는 혼란스러운 상황을 카메라 시점 분산으로 처리하려는 이유 때문이다. 좀비의 시선에서 쫓아가는 장면은 더욱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대책 없이 달려드는 좀비 떼에 공격을 해보지만 병사들은 속수무책 달려드는 좀비에게 쫓기고 당할 뿐이다. 이곳저곳에서 전투신을 방불케 하는 충돌이 빚어진다. 결국 목책이 무너지고 세자 일행은 퇴각한다.
좀비와의 전투 장면에서 주목할 점은 연발총의 사용이다. 오로지 전진만 하는 좀비들은 연발총에 속절없이 무너진다. 조선시대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이런 소품의 발현은 좀비와의 대결에서 우월한 위치를 점유하기 위한 포석으로 읽힌다. 그럼에도 패한다는 것은 그만큼 좀비들의 역향력이 강하다는 것을 반증한다. 연발총은 우금치 전투에서 일제가 동학농민군들을 향해 퍼부었던 기관총을 연상시킨다. 연발총 세례에 하릴없이 넘어지는 좀비들의 운명은 동학농민군을 닮았다.
좀비 떼가 출현하는 것을 알리는 말을 탄 병사들의 외침이 곳곳에서 들린다. 이 한 장면의 연출만으로도 더욱 상황이 악화된다는 것을 시청자들은 직감할 수 있다. 장면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연출자의 고도화된 전략이다. 세자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수많은 좀비 떼의 행렬은 암담한 현실 상황을 더욱 강조하는 장면으로 자리한다.
뗏목에서 좀비에 물린 환자를 죽이는 장면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환자는 조금 물렸다고 항변하지만 결국 동료들에 의해 물에 빠져 죽고 만다. 좀비에 물린 환자의 상황을 유추해 보면, 결국 죽어야 하는 것이 맞지만 아직은 인간의 속성을 지닌 상황에서 죽임을 당한 것뿐이다. 아군이 적군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은 영화 속에서 항상 새로운 방식으로 변주된다.
수로를 따라가는 바쁜 카메라의 시선. 갑자기 몰려드는 좀비와 자물쇠와 쇠사슬로 닫힌 문은 극적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시청자들은 결국 어떤 식으로든 문이 열릴 것을 알지만 초조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희생자는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여기서는 안현의 충복인 덕성이라는 수하가 그 역할을 맡는다. 호패를 주워 모았던 그의 행위는 결국 자기의 죽음을 예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드라마에서 복선이 깔리고 이를 실행하는 장면을 찾아보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좀비에게 팔을 물렸지만 자기를 희생하는 덕성. 앞선 비슷한 상황의 죽음과 대비되는 장면이다. 세자 일행에게 길을 열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택한 덕성을 위해 좀비에 포위된 그를 죽일 수밖에 없는 영신. 영신이 그를 죽이기 전 교차된 눈빛은 침묵도 말임을 느끼게 한다. 여기서 죽임은 살인이 아닌 인간애다. 좀비로부터 뜯어 먹히는 고통을 줄여주려는. 그들의 뒤로 돌아보면 수로 속에서 음산한 좀비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시청자 입장에서는 들리는 소리지만 극 중 인물들은 그 소리를 들을 수 없다. 드라마를 보면, 이런 미묘한 차이를 읽는 재미가 있다.
햇빛이 아니라 햇볕을 싫어했던 좀비의 속성을 동래 부사에게 말하는 서비. 빛이 아닌 온도로 속성을 치환하는 작가의 절묘한 트릭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아무래도 드라마 <킹덤>의 시즌2라서 차별성을 두려고 했던 작가의 의지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진화하는 좀비의 속성은 어쩌면 <킹덤> 출시 후 몇 달 뒤 실제로 코로나19와 악성 변이를 경험했던 실체적인 현실과 궤를 같이한다. 영화와 드라마가 현실을 재현한다는 것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한 말이 아닐까, 싶다.
드라마에서 새로운 사건의 발생은 필연적이다. 서사는 늘 사건을 매개로 진행된다. 이번 회차에서도 임신부와 아기의 살해 사건 발생은 극을 새로운 국면으로 몰아가는 중요한 전환점으로 작용한다. 무녀의 저주 의식. 중전의 상반신에 반쯤 비친 빛과 어둠은 캐릭터의 이중적인 속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공중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의 카메라 샷은 좀비와 대치하는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빛과 어둠의 대비는 침범하려는 자와 막으려는 자의 경계를 확인시킨다. 이즈음에서 곡물창고에 얽힌 시퀀스가 시작된다. 식량 부족을 말하는 안현의 수하는 주변 인물로 등장하여 잠시 극의 흐름을 이끈다. 이 시퀀스는 극의 진전을 위한 효용성에 주력한다. 안현의 또 다른 수하와 과거의 일을 들추는 장면, 이를 전해 들을 무영이 세자에게 그 내용을 고하는 장면, 세자가 결국 무영에 대한 신뢰를 철회하는 장면이 여기서 등장하기 때문이다. 동맹관계의 균열은 새로운 국면 전환의 모티프를 예상하는 동력이다. 결국 이 시퀀스는 곡물창고가 불타는 신으로 끝난다.
조학주를 죽이기 위해 세자 일행이 출정하는 장면은 비로소 세자가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섰음을 알려준다. 좀비들을 따돌리기 위해 성벽에 기대어 팔에서 피를 내어 유혹한다는 설정은 자기희생의 모티프를 상징하는 은유로 읽힌다. 여기서 강렬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은 성벽 아래를 향한 카메라가 좀비들이 절규하듯 하늘을 쳐다보는 상황을 위에서 직관한 순간이다. 이 장면은 드라마 <킹덤>에서 좀비들의 정체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는 상징적 요소로 자리한다. 이는 마치 신의 구원에 들지 못하는 인간들이 고통 속에서 절규하는 것처럼 종교적 서사로 읽히기도 한다.
이번 회차에서는 유난히 달려가는 신이 많다. 좀비는 앞을 향해 무작정 달려간다. 무작정 달려가다 보면 죽창에 찔리기도 하고, 함정에 빠질 때도 있다. 이런 드라마 속 장면은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과 그대로 병치된다. 세자 일행 또한 달린다. 조학주를 죽이고, 백성들에게 평안을 주기 위해. 목표있는 전진은 희망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