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화원 (15회)

다섯 개의 초상

by 정작가


이번 회차에서는 다섯 개의 초상을 찾아 숨겨진 어진의 비밀을 파헤쳐 가는 과정을 중심으로 극의 내용이 전개된다. 별제의 생일을 맞아 모인 잔치가 사건의 축으로 작용하며 극의 긴장감을 유발한다. 시청자들은 김홍도와 신윤복이 어떤 식으로 마지막 남은 한 점의 초상화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인지 주안점을 둘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다섯 개의 초상>이 다소 미스터리 스릴러 느낌이 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부분보다는 극 중에서 등장하는 인물들 간의 갈등관계와 권력을 둘러싼 대결 구도가 극의 멜로적인 속성을 보완해주는 측면에 보면 사극의 형태를 띤 멜로드라마라고 봐도 큰 문제는 없을 듯하다.


지난 <단오풍정>에서 보여주었던 여장 신은 미리 실체를 알고 있는 시청자들의 눈과 이를 알지 못하는 극 중 인물들과의 시선 대비를 통해 묘한 긴장감을 유발하는 효과를 노렸다. <다섯 개의 초상>에서 또한 신윤복의 여장 아닌 여장 신은 시청자들에게 캐릭터에 대한 이해를 이중삼중으로 해석해야 하는 관점으로 몰고 간다. 평면적인 인물보다 이런 입체적인 인물의 등장은 극의 내용을 다차원적인 측면에서 해석해야 하는 과제를 안겨주기도 한다. 이런 암묵적인 약속된 계산은 마치 연극의 방백처럼, 관객들은 그 소리를 알아들어도 극 중 인물들은 그 소리를 알아들을 수 없다는 사전 합의된 약속처럼 기능한다.


동성의 배우가 서로를 이성으로 느끼고 그 관계를 유지한다는 설정은 어떻게 보면, 다소 작위적인 느낌을 가져올 수도 있다. 배우 문근영이 다소 보이시한 느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자체로서 시각적으로는 온전히 여성으로 볼 수밖에 없는 상황임을 시청자들은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극 중의 재현되는 배우의 외모를 그 자체로 여성으로 보기 어렵다는 설정을 인지해야 하는 이중고를 안고 보는 시청자들에 대한 배려를 하지 못했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이는 김홍도와 신윤복을 이성적인 관계로 설정했던 극의 내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일 수도 있다. 이런 느낌을 더욱 각인시켜 주는 것은 촉각의 작용 통해 여실히 드러난다. 극 초반에 신윤복이 스승인 김홍도가 붕대를 감은 손으로 그림을 그리게 하기 위해 붓을 감싸 쥐어 주는 장면이라든지 안경을 씌워주는 장면은 이 광경을 지켜보던 극 중 호조판서 김명륜의 입을 통해서도 전달된다. 또한 별제의 생일 잔칫날, 화방에서 마주친 김홍도가 신윤복의 입을 틀어막는 장면처럼 우연치 않은 접촉 행위는 이들의 이런 단편적인 행동들이 연인으로서 발전할 가능성이 있음을 암시해 주기도 한다.


이번 회차에서 초상화의 일부분을 본떠 눈, 코, 귀, 입술 등의 부분을 오려 마치 퍼즐처럼 이어 맞추는 장면은 그 자체로서 수수께끼가 풀렸음을 암시한다. 애초에 김홍도의 스승이 이런 과정을 통해 어진을 완성하려 했던 것은 이를 방해했던 세력들의 눈을 피하기 위한 자구책이었다. 이런 비밀을 파헤쳐 가는 김홍도와 신윤복의 협공 작전은 결국 그들이 원하는 어진의 완성을 이끄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이런 대결 구도는 예술이 권력을 위한 도구로전락하는 한편, 예술가들 또한 그런 권력의 희생양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소수를 위한 예술의 독점성은 일찌감치 톨스토이의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텍스트를 통해 그 진정한 의미가 퇴색되었던 사례로도 접할 수 있다.


드라마의 내용을 보면, 신윤복의 적극성은 스승인 김홍도를 능가한다. 김홍도가 자신의 모습을 숨기고 북청 사자놀이의 놀이패로 활약하는 꼼수를 쓰는 반면, 신윤복은 아예 여장을 통해 변장술로 그림을 접수하기 위해 들어간다. 이런 적극적인 행보는 이미 그들이 더 이상 누군가에 예속된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포지션임을 시청자들로 하여금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이는 조선시대의 걸출한 두 거장의 존재가 대등함을 보여준다.


신윤복이 마지막 장면에서 스승을 구하기 위해 외인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장면은 자신을 구하기 위해 화상도 마다하지 않고 손을 불구덩이에 내던졌던 스승에 대한 미안함의 발로였을 뿐만 아니라 더 이상 자기로 인해 스승을 위기에 빠트리지 않을 것임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이런 신윤복의 적극적 행보는 자신을 위해 죽음을 맞게 된 형과 자신을 구하기 위해 몸소 불 속에 손을 던진 스승의 행동이 다시는 재현될 수 없도록 미리 방지하고자 하는 마음의 발로라고도 볼 수 있다. 이처럼 극 중 캐릭터가 어떤 사건을 계기로 심적으로 강인해지는 상태를 트라우마 성장, 혹은 내적 성장으로 일컫기도 한다.


드라마에서 적대관계는 갈등과 대립구도로 극의 재미를 가일층 향상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바람의 화원>에서는 큰 축에서는 정조와 정순왕후그 그런 구도다. 한 단계 밑으로 내려가게 되면, 김조년과 두 화원이 그런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 좀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 보면, 기생 정향을 두고 벌어지는 김조년과 신윤복의 대결이 볼만하다. 심리적인 차원에서는 이미 신윤복이 김조년과의 싸움에서 승리했지만 현실 속에서는 김조년이 신윤복을 고용하고 있는 형태라 그 위세에 눌릴 수밖에 없다. 다음의 대사는 그런 이들 간의 관계를 여실히 드러내준다.


"몇 가닥의 선만으로도 알아보시니 눈이 매우십니다."

"자네 그림 속에 그려진 사람들은 그 마음까지 느껴지네. 이 여인의 마음을 화폭 속에 담아 보여주게."

"여인의 마음을 어찌 이 좁은 화폭 속에 다 담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허나 이 좁은 화폭이라도 잠시나마 붙잡고 싶은 것이 이 사내의 마음일세."


이 장면은 삼각관계의 구도 속에서 묘한 경쟁 관계를 불러일으키는 대목이다. 단지 그것이 동성 간의 대결이 아니라 이성 간의 대결이란 측면에서 색다른 긴장감을 조성한다는 것이 여타 드라마에서 느껴볼 수 없었던 색다른 점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생일을 맞은 잔치에서 등장하는 북청 사자놀이는 보이지 않는 존재가 내뱉는 걸출한 말들이 상황을 더욱 예측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몰고 간다. 마치 영화 <왕의 남자>에서 놀이패들이 그들의 언어로 세상을 해석했던 것처럼. 이런 ‘가면화된 발화’는 존재를 숨기고, 진실을 말한다는 측면에서 실질적으로 그 도전을 받는 대상자들에게는 공포감을 유발하는 작용을 한다.


<다섯 개의 초상>에서 등장하는 김홍도의 작품은 <무동>이다. 연주를 하는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추고 있는 무동 장면을 통해 청각을 잃은 대감의 아들에게 웃음을 찾아주는 행위는 예술이 감각을 환원시키는 기능도 작용함을 보여준다. 대감의 아들이 무동이 춤추는 상황을 현실적인 상황에서 재연하는 장면은 오직 드라마와 같은 영상 예술이었기에 가능한 표현기법이다. 무동이 그림 속에서 살아나 현실 속에서 춤을 추고 있는 상황은 마치 꿈속의 한 장면을 그대로 차용한 듯 신비로운 느낌으로 그려진다. 이런 영상기법에 어우러지는 것은 당연히 음악적인 요소라고 있다.


<바람의 화원>에서도 여전히 음악은 극의 내용을 재단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다섯 개의 초상> 편에서도 신분을 위장하는 장면이나 다소 코믹적인 상황이 발생하는 부분에서는 그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더라도 직관적으로 음악을 통해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 드라마는 영화처럼 심층적인 내용을 파악하는 장르가 아니기 때문에 가급적 시청자들은 그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장치를 만들어 놓아야 한다. 유독 <바람의 화원>에서 자막이 많이 달리는 이유 또한 다소 생경한 고어(古語)에 대한 설명 없이는 극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바람의 화원>을 정극처럼 대하기 어려운 이유는 대사 또한 현대극에서 흔히 통용되는 말들을 거침없이 쓰기 때문이다. 이는 <바람의 화원>이 정통 사극이라기보다는 퓨전형 사극으로 요즘 장르로 팩션에 해당되는 속성을 보이기 때문이다. 팩션은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이를 픽션 형식으로 재구성하는 장르다. 그러다 보니 다소 고증이 부실하더라도 큰 욕을 먹을 이유도 없고, 시청자들 또한 그런 시대극의 가치보다는 시대의 옷을 입은 현대 장르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런 방식의 접근이 가능하지 않았나 유추해 볼 따름이다.


결국 <바람의 화원>은 두 화가의 위대함을 드러내 주려는 의도로 기획된 극적인 요소도 분명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동성이었던 두 화원을 이성 관계로 설정하는 파격적인 원작을 토대로 이를 극화함으로써 사극을 표방한 드라마라고 정의한다고 해도 크게 이상할 이유는 없을 것 같다. 극 중 등장하는 김홍도와 신윤복의 그림을 보는 재미 또한 쏠쏠한 것은 드라마가 단순히 유희의 차원에서 머무르지 않고, 예술의 감각을 벼리게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심어주었던 측면에서 새롭게 조명될 여지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색다른 접근 방식은 <바람의 화원>이 새로운 시점에서 극의 형태를 창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타전했던 드라마라고 의미를 부여해도 좋을 만한 지점이다. 이번 회차가 <다섯 개의 초상>이라는 제목에 집중하기보다 김홍도와 신윤복의 로맨스가 돋보이는 것은 이미 이런 초상과 어진이 극의 중심이 아니라 소재로서 기능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 극의 내용보다 주인공들의 행로가 어떤 방식으로 이어질지 더욱 관심이 가는 것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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