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조미술의 새로운 전통
이 장에서 다루고 있는 조형물은 석등과 당간이다. 석등은 석탑과 더불어 우리의 고유 석조미술로 독자적인 위상을 지닌 유물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에 따르면, 중국과 일본 사찰에서는 목재나 청동으로 만든 등이 유행한 적이 있었고, 우리나라에서는 유난히 석등이 발달했다고 한다. 석등의 구조를 기술한 대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석등의 구조는 하대석, 간주석, 상대석, 화사석, 지붕돌, 그리고 보주가 있는 상륜부로 구성된다.
이런 구조는 경주 불국사 대웅전 앞 석등의 모델로 기술한 것이다. 석등은 총 15개의 유물을 소개하고 있는데, 익산 미륵사 석등의 하대석만 제외하곤 모두 온전한 형태의 석등이다.
팔각 간주석 석등으로는 <남원 백장암 석등>, <영주 부석상 무량수전 앞 석등>, <보은 법주사 사천왕 석등>, <합천 백암리 석등> 등이 있다.
고복형 석등은 간주석 모양이 장구 몸체와 비슷한 것이 특징이다. 이런 석등으로는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 <남원 실상사 석등>, <임실 진구사 석등>, <합천 청량사 석등>, <담양 개선사 석등> 등이 대표적이다.
쌍사자석등은 <보은 법주사 쌍사자석등>, <광양 옥룡사 쌍사자석등>, <합천 영암사 쌍사자석등> 등이 있다.
석등에서 간주석은 중요한 부분이다. 위로는 석등을 떠받치고 있고, 아래로는 하대석의 지지를 받는 중심부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이 간주석을 무엇으로 하느냐에 따라 팔각, 고복형, 쌍사자석등으로 나눌 수 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간주석 또한 점차적으로 예술적으로 변했다. 팔각 간주석이 다소 밋밋한 형태라면 고복형은 예술적인 감각이 더욱 가미된 석등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특히 쌍사자석등은 불교에서 신성한 동물로 일컬어지는 한 쌍의 사자를 활용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대표적인 유물이다. 쌍사자 형상 또한 예사롭지 않다. 저자가 기술한 내용을 보면, 개략 그 형상을 짐작할 수 있다.
석등을 받치고 있는 쌍사자의 모습은 두 마리가 모두 뒷발로 서서 가슴을 맞대고 앞발로 석등을 받드는 형상인데 뒷다리에 힘을 모아 디디고 있는 모습이나 사자의 얼굴 표정에는 생동감이 넘친다.
특히 이 부분에서 저자가 언급한 공허공간(空虛空間)의 개념은 현대 조각에서야 일반화된 것인데 이미 1천 년 전에 이런 기법이 신라 시대에도 보이고 있다는 점은 놀랄만한 일이다.
당간은 저자가 기술한 바에 따르면, 통일신라 이후의 사찰 건축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당(幢)이 깃발을 의미한다고 하니 깃대인 간(竿)을 높이 세워 깃발을 걸었던 것을 당간(幢竿)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당간을 지탱하는 것을 당간지주라고 한다. 당간지주는 한 쌍의 화강암 지주로 설치되는데, 저자가 언급한 것처럼 국기 게양대를 연상하면 된다. 현재에는 당, 당간, 당간지주가 온전히 남아있는 것은 없다고 한다. 다만 ‘금동용두보당’과 같은 약 1미터 정도의 고려시대의 미니어처가 전하고 있어 그 모습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사진의 도판을 보면, ‘금동당간용두’라 하여 용머리 모양의 당간용두를 볼 수 있다. 당간의 맨 위에 걸려있다면 그 위용을 느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마치 한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형상처럼.
당간지주는 그래도 제법 많이 전하고 있다고 한다. <영주 부석사 당간지주>와 <익산 미륵사 당간지주는>는 높이 약 4미터의 대표적인 거석으로 자리하고 있다. 특히 마지막에 소개하고 있는 <강릉 굴산사 당간지주>는 그 높이가 무려 5미터가 넘는다. 저자는 이 유물에 대한 평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처럼 조각 행위를 일부러 남겨 보는 이로 하여금 테스처와 마티에르를 느끼게 해주는 것은 20세기 현대 조각에서나 볼 수 있는 기법인데 이런 조형 감각이 9세기 하대신라에 있었다는 사실이 신기할 정도이다.
실제로 사진의 도판을 보면, 마치 한 편의 현대 조형 예술을 직면한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석등과 당간을 보면 석조술이 발달하게 된 원인이 화강암이 많았던 우리나라의 지형적 특성을 간과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돌을 다루는 기술은 현재에도 쉽지 않은 일이다. 하물며 이미 천 년 이전에도 뛰어난 예술의 조형 감각을 통해 이와 같은 유물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선조들의 뛰어난 심미안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유추해 볼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