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관시술 - 가벼운 몸, 무거운 전원서류

난임일기

by 라즈베리

서류 봉투에 담긴 전원서류를 들고 지하철을 탔다.

전원서류가 가장 큰 스테이플러로 찍기에도 너무 두꺼웠는지 두 개의 큰 집게로 나누어져 집혀 있었다. 이 두꺼운 기록이 지난 1년 동안의 나의 일기장이자 발자취이며 나의 카드명세서나 다름없었다.


오늘은 나의 첫 주치의 선생님인 A선생님이 새롭게 개원한 병원에 가는 길이다. 어쩜 좋아요... 어떡해요..라고 방법을 찾지 못하는 선생님을 떠나 다시 확신에 차서 나를 이끌어 줄 수 있는 A선생님께 가기로 결정했다. 임신도 아니고 다음 차수를 시작하기 전 유일한 쉬는 시간이다. 커피를 마음껏 마셔도 되고 마음껏 뛰어다녀도 되고 맥주도 한 모금 마셔도 되는 아주 꿀 같은 시간이다. 평소 같으면 그래! 이 시간을 즐겨보자!라고 이 틈새에 약속도 잡고 미용실도 가고 할 텐데 나는 지금 아무런 의욕이 없다. 신선 2차와 냉동 4차 모두 실패 이게 나의 성적표다. 1년 내내 임신에만 매달렸는데 아무것도 손에 남지 않았다. 지하철 맞은편에 있는 임산부 좌석이 눈에 들어왔다. 저기 한번 앉아 보는 게 내 소원인데 이번 생에 이루어질 수 있을까?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한숨 그리고 손에 든 전원서류가 유독 무겁게 느껴진다.


저번에 A선생님을 방문했을 땐 배아생성허가 전이라서 상담만 받고 돌아섰다. 이제는 시간이 흘러 시험관 시술도 가능해져서 병원에 제법 사람이 많이 있었다. 접수를 끝내고 소파에 앉아서 숨을 돌렸다. 낯선 공간에 오니 뭔가 나도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기분이 들었다.


몇 분을 기다렸을까 내 이름이 진료실 앞에 설치된 안내판에 뜬다. 똑똑


"들어오세요"


선생님 얼굴을 보자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침을 꿀꺽 삼키며 눈물도 삼켰다.



"선생님 자궁경도 하고 PGT통과 배아를 이식했는데 피검사가 0이 나왔어요. 이제 남은 배아도 없고 저는 어떡하면 좋을까요?"


"부부 유전자도 정상이고, 배아 3개 PGT검사 보냈는데 3개가 다 통과 됐으니 우리 이번에는 PGT 없이 해봐요, "



너무 놀랬다. PGT를 권해주신 것도 A선생님인데 PGT를 없이 해보자는 것도 A 선생님이다. 전혀 내 예상 답안지에 없던 대답이라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이런 선생님의 파격적인 제안이 너무 감사했다. 아직 프롤루텍스 주사의 영향이 있는지 생리는 시작하지 않고 있었다. 2-3일 내에 생리가 시작할 것 같으니 그때 다시 약을 처방받기로 하고 진료실을 나왔다. 병원을 나와서 햇살이 가득한 하늘을 보는데 희망 한줄기를 본 것 같았다. 먼 길을 돌고 돌아 다시 처음과 같이 PGT 없이 이식을 해보기로 했지만 이제는 PGT 없이 이식해도 괜찮다는 증거가 있었다. 그리고 A선생님은 빠르게 그걸 캐치해 냈고 저번 차수와는 다르게 가자고 제안해 주신 것이 너무도 감사했고 그걸로 인해서 내 숨통이 트였다. 아무런 탈출구도 없는 줄 알았던 터널에서 탈출의 가능성을 맛본 것이다. 그냥 그것만으로도 내 마음은 다시 회복을 하고 있었다.


병원에서 나와 무작정 발 닿는 데로 한 바퀴를 돌았다. 바람이 솔솔 불어오는 벤치에 앉아서 커피를 한잔 했다. 바람을 타고 온 꽃향기에서 좋은 소식의 기운을 느꼈다. 그래 아직 포기할 때가 아니야. 조금만 더 힘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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