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차
이번주 금요일은 부활절 연휴인다. 개강하자마자 부활절 연휴라니. 너무 좋아서 어깨춤이 절로 나온다. 한국으로 치면 개강하자마자 추석 연휴가 끼어 있는 셈이다. 초중고등학생들은 이 연휴를 중심으로 거의 2주 가까이 쉬는 것 같던데, 대학교는 ‘금요일 + 다음주 월요일’ 딱 이틀만 공식 빨간날로 쉰다. 덕분에 이번주는 월요일부터 좀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마음은 가벼웠으나 월요일 첫 수업부터 지각을 했다. 아침 8시 15분에 수업이 있는데 아이가 늦게 일어나는 바람에 눈썹 휘날리며 뛰었지만 8시 30분에야 강의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월요일 첫 수업은 C++ 프로그래밍 수업인데, 시험은 학교 실습실에 설치된 이클립스 C++ 로 본다고 한다. 이론보다 실습이 중요한 수업이다. 뒤늦게 도착해서 뒤에 앉아서 앞의 친구들을 살펴보니 이미 많은 학생들이 노트북에 이클립스를 설치해와서 수업을 따라 코딩을 하고 있었다. 요즘 학생들 보면 정말 공부를 효율적으로 한다. ‘라떼는 말이야~’ 필기 대충 해서 집에서 옮겨 적고, 시험기간 되면 벼락치기하던 시절이었는데… 요즘은 앞자리에 앉은 학생들 보면 아이패드에 강의자료 붙여넣고, 그 위에 필기하고, 동시에 ChatGPT한테 물어본 내용까지 정리해서 붙여넣고. 덕분에 나도 공부법을 업그레이드하게 됐다. 나도 다음주엔 꼭 교수님 따라서 코딩하며 수업을 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매번 다짐만 하는게 문제이긴 하다 하하
집에 와서 문득 생각났다.
2년 전, 그림 한 번 제대로 그려보겠다고 사두었던 애플펜슬. 포장도 뜯지 않은 채 신주단지 모시듯 고이 모셔둔 그 펜을 꺼냈다. 드디어 나도 디지털 필기의 세계로 들어가는구나, 기대에 부풀어 아이패드에 가까이 대봤는데… 전원이 안 켜진다.
검색을 해보니, 오래 방치된 애플펜슬은 배터리가 완전히 방전돼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다나. 두 시간 충전해봤지만 여전히 미동조차 없다. 페어링 메시지는 뜨는데, 정작 아이패드는 이 펜을 존재 자체로 인식하지 못한다. 아… 미처 한 시간도 함께하지 못하고, 그렇게 조용히 생을 마감하다니. 포장도 안 뜯은 애플펜슬, 너 참 허무하게 갔구나.
결국 마음을 다잡고 아마존에서 짭슬펜(짝퉁 애플펜슬)을 하나 주문했다. 처음엔 좀 씁쓸했지만, 웬걸—이 짭슬펜, 하루 만에 내 삶의 질을 드라마틱하게 끌어올렸다. 강의자료에 바로바로 필기하고, 궁금한 건 ChatGPT에게 물어보고, 정리까지 척척. 뿌옇게만 느껴지던 강의실이 갑자기 색을 입은 느낌이었다.
특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통 감이 오지 않는 Diskret Mathematik 수업. 이 짭슬펜 하나로, 그 수업에도 한줄기 빛이 비추기 시작했다. 너무 신나서 이것저것 ChatGPT에게 물어보다가 “좀 더 쉽게 말해봐”를 입력하는 순간, 그만… 음성 모드가 켜지고 말았다. 그 넓은 강의실에 울려 퍼진 목소리. 이목은 한몸에 받고, 내 얼굴은 토마토처럼 빨개지고…
그래도 좋았다. 부끄러움은 잠깐, 그 덕분에 또 한 번 강의실이 생생하게 살아나는 순간이었다. 이게 바로 요즘식 공부법의 묘미인가 보다.
수요일도, 목요일도, 금요일도 아침 8시 15분 수업이 있다. 여름학기라 그런지 아침부터 시간표가 빽빽하다. 아이가 조금만 일찍 일어나주면 좋겠지만… 이번 주는 매일 첫 수업을 지각으로 시작했다.
사실, 곤히 자고 있는 아이를 억지로 깨워가며 학교에 올 만큼 내가 열성적인 학생은 아니다. 두 돌을 갓 지난 아이는 지금 ‘재접근기’에 접어들었다. 엄마에게 끊임없이 감정적 연결을 확인하고 싶은 시기다. 그런 아이가 편안하게,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하는 게 내게는 더 중요한 일이다. 아이가 아침에 일어나서 “엄마!”하며 나를 부른다. 문을 열고 방에 들어갔을 때 활짝 웃으며 다가오는 아이의 얼굴을 보면 오늘 하루도 행복하게 시작해서 다행이다 라는 안도감이 든다.
그 결과, 이번 주 월요일도, 수요일도, 목요일도 어김없이 지각을 했다. 매번 강의실 문을 살짝 열고 들어가 맨 뒷자리에 앉는다. 답답하고 잘 안 보일 때도 있지만, 어쩌겠는가. 지금 내가 감내해야 할 몫이다.
학교를 연달아 두 학기 다니다 보니, 낯익은 얼굴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새 캠퍼스가 낯설기만 하던 공간에서, 조금씩 내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는 느낌도 든다. Micro Computer Technik 수업의 강의실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지난 학기 자바 수업을 같이 들었던 얍쌉이가 나를 보며 아는 척을 한다. 머리를 2:8로 젤을 발라 잘 빗어넘긴 레바논 출신의 얍쌉이는 이번학기도 아주 단정하고 잘 관리된 모습으로 나타났다. 지난 학기 자바 수업 마지막날 서로 이야기를 나눴는데 나의 편견보다는 꽤나 성실한 학생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꾀를 많이 부리는 얍쌉이인 것은 확실하다.
얍 : "안녕!!"
나 : "안녕! 너도 이 수업들어~?"
얍 : "어! 너도? 뭐뭐들어?"
나 : "알고리즘이랑 Diskret Mathematik 듣는데 너무 어렵다."
얍 : "Disrek Mathematik 그거 꼭 F교수님껄로 들어야돼! 나 지난학기에 10일 공부하고 3.8로 패스했어!"
나 : (동공의 지진이 있었으나 티를 내지 않으며) "아 진짜~? 나도 F교수님꺼 듣고 있어! 시험 괜찮았어? 다행이다."
얍 : "어 족보에서 다 나왔어. 우리 이 수업 같이 들으니 전화번호 교환하자!"
얍쌉이와 전화번호를 교환했다. 이렇게 아는 사람이 한명 두명 생기는 학교 생활이 아직도 신기하다. 그나저나 얍쌉이! 너 좀 귀엽다! 3.8이라니… (C로 간신히 패스했다는 뜻) 이렇게 당당하게 말하는 거 너무 귀엽잖아! 그래, 얍쌉이도 패스했는데 나라고 못할쏘냐. 수업 다 듣고, 연습문제 꾸준히 풀다 보면 어떻게든 되겠지. 이번 학기는 욕심내지 말고, ‘참여’와 ‘패스’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목요일 밤부터 부활절 연휴가 시작됐다. 오랜만에 아무 일정 없는 연휴다. 침대에 누워 조용히 눈을 감는데, 지난해 크리스마스 새벽, 자바 코딩을 붙잡고 씨름하던 내 모습이 불쑥 떠올랐다. 어떻게 그걸 했을까? 그땐 정말 벼랑 끝에서 간신히 버텼는데… 지금 다시 하라고 하면 못할 것 같다. 역시 사람은 코앞에 닥치면 뭐든 하게 되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이번 부활절 연휴는, 그야말로 ‘쉬는 게 계획’이다. 하하 잘 먹고, 잘 자고, 그냥 푹 쉬어야지. 이번 학기 공부? 음… 다음주의 내가 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