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구조(설정)든 가져와 '남자셋 여자셋'을 더하는 한국식 작법
"아마 성취를 위해 사는 건 아닌 건가봐."
"그럼 뭘 위해 사는거지?"
<미스 슬로운>은 아름다운 영화다. 선행된 '선언'이 행동으로 실행되어 '결과'가 될 때의 쾌감, 그것을 카타르시스라고 할 수 있다면, 그 카타르시스를 제대로 완수하는 영화기 때문이다.
<미스 슬로운>은 눈을 감고 있던 미스 슬로운이 미묘하게 고개를 틀어 정면을 응시하며 "로비의 핵심은 통찰력이에요."라고 선언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 선언은 운명이 되고, 영화는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골짜기들로 우리를 이끌다가, 끝내 예언을 실현시킨다.
"로비의 핵심은 통찰력이에요.
상대의 움직임을 예측한 후 대책을 강구해야 하죠."
미스 슬로운은 이 영화의 주인공이고, 그녀를 이루는 모든 요소는 모두 스토리로 전개된다. 영화는 매우 효과적으로 미스 슬로운의 캐릭터를 스케치한다.
초반 5분 동안 영화는 그녀가 청문회장에서 공격받고 있는 상황을 알리고, 시간을 6개월 뒤로 돌려 그녀가 유능한 로비스트며, 일에 지나치게 열정적이고, 사안을 바라보는 관점과 개념을 바꾸는데 능한 전략가임을 보여준다. (회의 장면)
그리고 그녀를 화장실까지 좇아가 대학원 진학 의사를 밝히는 오른팔 후배가 있음을 그려내고, 그 후배를 피해 화장실 칸에 숨어 몰래 약을 삼키는 장면 또한 그려낸다. 화장실 칸은 완벽해보이는 그녀가 무너지는 몇 안되는 공간이며, 후에 나오지만 호텔에서 은밀히 만나는 남창 역시 슬로운의 약한 부분이 노출되는 공간이다.
그리고 10분대에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제안이 놓여진다. '총기 규제에 목소리를 내는 여성들을 총기 지지자로 돌려세우자는 캠페인'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미스 슬로운은 이를 비웃으며 거부한다. 총기는 기본적으로 규제해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신념이기 때문이다.
영화<미스 슬로운>은 '신념으로 움직이는 로비스트에게 윤리적 결함이 있다면 어떨까?'라는 호기심을 동력삼아 움직이는 듯 보인다. 신념을 위해 일한다는 건 아름답지만, 윤리적 결함이 있는 건 아름답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름다움과 아름답지 못함을 동시에 가진 야누스적인 인물은 흥미롭고, 주인공이 되기에 충분하다. 이런 면모로 미스 슬로운은 전형적인 히어로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녀는 총기를 규제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작은 로비회사로 옮겨가 불가능한 미션처럼 보이는 총기규제 법안을 밀어붙인다. 그녀가 '승리에 미쳐있으며' 남들이 모르는 방식으로 덫을 설계하는 전략가임이 30~60분대에 묘사된다. 한 때 동료있으나 적이 된 팀과, 새롭게 승리를 위해 나아가는 팀이 맞붙는 시간대도 이 시간대다. 한 차례의 전쟁이 지나간 뒤 미스 슬로운은 '윤리적 골짜기'에 놓이게 된다.
그것은 바로 총기사고의 생존자이자 현재 동료인 에스미를 총기규제법안의 마스코트로 내세우는 일. 에스미는 자신의 과거를 비밀로 하고 있고 철저히 숨겨왔지만, 슬로운은 전략적 승리를 위해 에스미를 '아웃팅'시키는 일을 거리낌없이 자행한다. 또한 슬로운이 승리를 위해 불법사찰과 도청도 거리낌없이 할 수 있음이 드러난다. 모든 것을 도구화하고 게임화시키는 슬로운의 모습을 보며 그녀의 동료들은 슬로운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혐오한다.
얼음처럼 차가워보이는 슬로운조차 누군가의 실망을 두려워하고, 스스로 자책하거나 약해지기도 한다. 물론 이런 모습은 화장실 혹은 남창(자신의 약점이 드러나는 유일한 공간들) 앞에서나 언뜻 드러나고 결코 길게 그녀를 붙잡지 않는다.
슬로운이 일하는 방식은 'give & take'의 논리를 바탕으로 한다. 모든 관계도 그렇다. 내가 내어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얻을 수도 있는 것이다. 슬로운은 그것이 전략이자 협상이자 일이 돌아가는 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이 잃을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상정하고 이 모든 계획을 준비해왔다.
그리고 그것은 earthquake로 결말부에 터져나오며 카타르시스를 완성한다. 내가 가장 원하는 것과 내가 가장 원하지 않은 것이 교환되고, 일의 추진력과 나 자신의 붕괴가 거래된다. 그것은 비극이지만 또한 영웅의 여정을 완성하는 세레모니기도 하다. 슬로운의 마지막 통찰은 '전부를 얻기 위해 전부를 잃는 것'이다.
그러나 언뜻 보면 그녀는 모든 것을 잃을 뿐이지 얻는 것이 없다. 영화는 그녀의 세계를 구축해왔던 give&take의 구조가 모두 무너진, 그 공허에서 새롭게 싹트는 의미를 조금 탐미하며 끝이 난다.
이해한다. <미스 슬로운>은 정말 멋지고 아름다운 영화니까. 정말로 베껴쓰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검색어를 입력하세요-WWW>(이하 www)는 카피에 성공하지 못했다. <미스 슬로운> 구조가 원래 가졌던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구조의 뼈대만 남았기 때문이다.
창작의 세계에서는 구조를 베끼는 것을 장려한다. 소위 '플롯'이란 개념이다. 세상에 나와있는 플롯은 한정되어 있으며 그것을 다양한 방식으로 재활용할 뿐이라는 이론도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만의 레시피로 완전히 녹아들었을 때의 이야기지 www처럼 누가봐도 겉만 가져다 썼을 때 할만 한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예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일본에서 크게 성공한 드라마<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를 한국 드라마 <이번 생은 처음이라>가 카피했을 때다. 이 때는 남녀가 동거하게 되는 설정과 흐름만 카피하고 그 뒤부터는 그 당시 시대상을 녹여내 만든 서른살 판 <남자셋 여자셋>이었다. 그런데 www도 나이대만 40대로 바뀌었을 뿐이지 또 <남자셋 여자셋>을 유지하며 <미스 슬로운>을 카피한 것이다. 특히 결말부 earthquake가 똑같이 재현됐을 때는 낯뜨거울 정도였다. 시작과 구조와 끝이 같은 게 오마주는 아닐 것이다.
우선 첫장면 선언. 소재는 '검색어 조작'이다. 주인공 배타미(임수정)는 선배인 송가경 이사와 함께 쓴 포털윤리강령을 지킨다는 신념 아래 검색어 조작을 거부하고 부인한다. 이를 위해 국회의원의 성범죄 사실을 폭로한 배타미는 자신의 청춘을 바쳐 일한 회사에서 해고당하고 2위 회사인 바로로 스카우트되어 이직한다. 이직의 목표는 바로의 점유율을 1위로 높이는 것.
여기서 www는 미스 슬로운의 유능함과 승리에 집착하는 성격을 배타미에 부여하는 듯 하지만 슬로운처럼 완벽하게 그려지진 않는다. 다만 슬로운의 연약한 지점은 그대로 가는데, 화장실처럼 숨는 공간은 통신이 두절되는 운동장 공간으로 이어지고, 슬로운의 약점이 노출되는 남창과의 만남 장면은 게임을 함께 한 하룻밤 그 젊은이(?)로 옮겨간다.
www의 전반부는 검색어의 힘을 설명하며 검색어로 인해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죽기도 하는 상황을 그려낸다. 여기서 슬로운이 겪는 약간의 윤리적 갈등을 따라하는데 역시 슬로운처럼 깊어지지 못한다. 배타미가 겪는 미약한 윤리적 갈등은 이후 송가경(전혜진)으로 옮겨가고, 송가경은 슬로운처럼 자신을 폭파시켜 적(검색을 조작하려는 시어머니와 대통령)을 무너트린다. 그러니까 나름 초반부에 선언된 포털윤리강령을 지켜낸 것이다. 그러나 여자 셋의 우정과 전쟁, 마흔판 남자셋 여자셋의 꽁냥꽁냥을 그려내며 파편화된 스토리를 통과한 예언(선언)은 결말에서 실현되더라도 <미스 슬로운>같은 파괴력을 갖진 못한다. 드라마로 장르가 바뀌긴 했지만 자신이 설정한 구조를 유지하며 나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새삼 느끼게 해주는 것이 www의 성과라면 성과다.
그럼에도 www의 재밌는 지점은 분명히 있다. 특히 기존에 남자 캐릭터가 가졌던 요소들을 여성에게 대치시켰을 때 나오는 신선함이 바로 그것이다. 그동안 회사에서 힘을 가진 임원 캐는 모두 남자의 역할이었으니까. 그 힘으로 여자를 좌지우지하며 남성의 유능함과 전능함을 과시했던 것이 과거의 로맨스드라마였다면, www에서는 여성이 힘을 갖고 있고, 여성의 힘에 무력한 남자들은 순종적으로 따르는 수동적 역할에 머무른다. (물론 하룻밤 그 젊은이는 28세의 패기로 배타미를 들었다놨다 하긴 하지만 큰 흐름에서 배타미에게 끌려다닌다.)
거기다 여자 셋의 우정처럼 디나이얼의 우회로를 거치긴 했지만 일하는 여성들끼리의 로맨스를 그려냈고 이는 분명 기존의 한국 드라마에서는 잘 볼 수 없던 장르적 재미를 만들어냈다.
<미스 슬로운>을 너무 사랑했고 칠칠 맞지 못하게 그 흔적을 흘린 점, 너무 많은 설정과 목표를 두고 있어서 그것이 한 큐로 꿰어지지 않은 점이 아쉽지만, 누군가 이 실타래를 잘 풀 수 있다면... 그건 분명 매력적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