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시부터 다섯시간, 열여덟번째 편지
안녕하세요
긴 단잠을 꾸고 온 기분입니다. 눈을 떠 보니 날씨는 황급히 서늘해졌고, 달력의 숫자는 한자리수를 보내고 두자리수를 가장 크게 걸고 있네요. 시월입니다. 십월이라 발음하지 않는, 여린 마음의 계절 시월이 왔어요. 왁자지껄한 연휴를 보내고 돌아오니, 유달리 평일의 시간이 더디게만 가는 것 같습니다. 흐릿한 회색빛의 하늘은 마음을 더욱 우중충하게 만들어주네요. 이런 반복에도 끝은 있을 예정이니까 그 사실 하나만 가슴속에 꼬옥 품어두고 하루를 버텨나갑니다.
저는 자주, 스스로에게 큐레이팅을 많이 합니다. 말이 거창하지만, 그냥 이런 식이에요. 어제 밤에는 비가 줄기차게 내리는 게, 방정리를 하고 난 후의 그 애릿한 감성과 감정이 잘 섞여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아서 “레이니 데이 인 뉴욕”이라는 영화를 재생하려 했어요. 단순하죠. 비가 오니까요. 오늘은 문득 10월이 시작됨을 눈치채고 난 후에, 영화”시월애”가 보고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말장난 같지만, 이런 사소한 서사마저 부여하면서 콘텐츠를 보고, 즐기다보면 내 거대한 인생도 잘게잘게 이유있는 조각들로 쪼개져서 뭐든지 의미있어지는걸요.
이건 영화뿐만이 아니에요. 음악을 선곡할 때도 꼭 이렇게 맥락을 챙겨가고 싶어하죠.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는 건 파리에서 들었던 “Paris in the Rain” 이에요. 한국에 있을 때에도 즐겨듣던 노래인데, 지난 여름에 파리로 향하게 되는 일정이 구체화되면서, 그 곳에서 이 노래를 들으면 정말 끝내주겠다는 생각을 곧장 떠올렸죠. 그리고 일행인 친구들 모르게 조용히 빌었던 것 같아요. 파리에서의 하루쯤, 아니 몇시간이라도 좋으니 비가 내리게 해달라고.
다소 이상한 바람이지만, 저는 비 오는 날씨를 꽤나 좋아하는 편입니다. 물론, 앞선 편지에서도 말했듯이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이라 쉽사리 우울해지고 우중충해지는 경향은 있지만, 그 나름의 우울에 도취되어 감성에 푹 절여져 있는 것도 제가 즐기는 몇 없는 비극적인 낭만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저는 실내에 안온하게 앉아있거나 누워있는 채로, 바깥의 빗소리와 비냄새를 듣고, 맡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에요.
파리에서의 4일 중에 둘째날 밤. 디즈니랜드에서 돌아와 고된 몸을 침대에 잔뜩 내던졌을 때, 바깥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어요. 천둥 번개도 잦았고, 주륵 주륵 옹골차게도 빗줄기가 내리는데, 호다닥 침대에서 일어나 블루투스 스피커를 연결한 뒤 Lauv의 Paris in the rain을 재생했습니다. 거리를 가득 채운 주황색 가로등과 왠지 모르게 푸른빛이 감도는 밤하늘의 공기. 그 주황색과 푸른색의 묘한 색채 대비감이 이 음악과 어우러져서 파리의 밤을 더 로맨틱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날 낮까지 도시 곳곳에서 나는 찌린내 때문에 파리에 대한 인상이 좋지 않았었는데, 비가 그 모든 걸 씻겨내려주듯이 그 노래와 그 밤의 빗방울을 기점으로 파리를 새로이 다시보게 되었습니다. 왜 사람들이 낭만의 도시라고 입을 모아 말하는 지 아주 조금은 알겠더라고요. 이런 식의 셀프 서사 만들기는 기억을 추억으로 바꾸어주는 데에도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습니다. 바쁜 일들이 조금 지나고 나면, 이번 달안에는 꼭 시월애를 마저 봐야겠어요. 작년에 도전했다가 너무 지루해서 중간에 노트북을 덮은 전적이 있거든요. 이번에야말로 이겨내보겠습니다.
토요일에는 하루에 영화를 두편이나 봤습니다. 전부터 보고싶던 프랑스 영화 “사랑할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를 이대 모모하우스까지 가서 보았는데요. 요즘의 취향은 프랑스 영화가 또 맞는 것 같습니다. 공드리처럼 뜬금 없는 타이밍에 판타지스러운 연출이 나오면서 화면 가지고 장난치는 것도 너무 재치있다고 생각되고, 매번 사랑 타령하는 건 조금 지겹지만, 항상 지랄맞고 해괴망측한 사랑을 다양히도 다룬다는 점에서 자꾸 찾게 되는 매력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러게 증오하고 애증해도, 인간은 사랑을 너무 좋아하니까요.
그치만 프랑스영화 클리셰인 늙은남자와 젊은여자의 사랑이야기는 그만 보고싶습니다. 웩.
그리고 매번 어찌 그렇게 치정적인 사랑을 할 수 있는지, 서로에게 그렇게 달려들고, 서로를 이해하고 오해할 힘이 남아도는 게 존경스러울 지경입니다. 웃기게도 프랑스 영화를 보면, 상영 내내 깨어있으나 중간에 잠에 드나 영화를 이해하는 데에 지장이 없습니다. 말하자면 어차피 내용이 괴상하게 흘러가니 중간에 졸았어도 전반적인 내용을 이해하는데에 큰 문제가 없다는 것이에요.
그래서인지 저는 프랑스영화를 보면 꼭 막판 5분의 1지점에서 잠시 졸고 말거든요. 이상하게 매번 그 타이밍쯤에서 영화전개가 확 지루해지는 부분이 있더라고요. 그렇게 졸다 깨어나도 달라진 상황에 전혀 놀랄 필요는 없습니다. 졸지 않고 봤어도 어차피 전 두눈이 커지면서 이해하지 못할 내용이었을 테니까요. 그게, 프랑스 영화의 매력. 이라고 적어두겠습니다. 사누최 영화의 한줄평을 말씀드리자면, 사랑할 땐 정말 누구나 최악이 되는구나. 그리고 인생은 정말 가지가지구나. 뭐 이런식?
남자 주인공의 외모도 그렇고, 지랄맞은 사랑을 다룬다는 점이나, 내용에 비해 장면들이 이질적으로 너무 아름다운거나, 이러한 여러 공통점들로 인해서 저는 영화 “펀치드렁크러브”가 자꾸 생각났던 것 같아요. 정말 짜증나고 싫지만 묘하게 끌리는 영화라는 점에서도 제겐 비슷하게 느껴지구요. 마치 저의 길티플레져랄까요.
토요일 밤에 본 두번째 영화는 바로 패딩턴입니다. 낮에 사누최를 같이 본 친구들과 한강 야외상영을 보러 망원한강공원으로 향했고, 틀어주던 영화는 영국, 런던을 배경으로 한 영화 패딩턴이었습니다. 런던에 다녀온지 얼마 안되어서 그런지, 영화를 보는 내내 알 수 없는 이상한 향수병에 휩싸인 느낌이었습니다. 주인공 가족들이 사는 동네가 또 하필 노팅힐이고, 제가 묵었던 숙소 5분거리에 위치한 라인의 집이라, 얼마나 반갑던지요. 당장이라도 그 쪽 길 앞을 지나 코너를 돌아서 올리버네 집으로 귀가를 해야할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습니다. 런던하면 떠오르는 유명한 영화답게 런던 도시 곳곳을 로케로 다루더라고요. 혹여 런던 갈 계획이 있는 사람들은 이 영화를 챙겨보고 가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저는 오히려 순서를 거꾸로, 그 곳을 다녀온 뒤에 봐서 반가웠지만, 먼저 보고 갔더라면 그곳을 둘러보면서 생생히 느낌이 신선했을 것 같아요.
이제야 알 것 같은 것들 있잖아요. 지나가던 빈티지 골동품 상점앞에 왜 사람들이 줄을 서서 사진을 찍고 있었는지, 하는 것들. 그 곳이 영화 촬영지였구나.
이젠 여름 옷을 전부 집어넣어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변명할 여지 없이 가을이 찾아왔네요. 아침의 이불 속이 여느때보다도 더 달콤하고 폭신하게 느껴집니다. 저는 오늘부터 저녁수영을 다니게 되엇습니다. 몇 시간뒤에 첫 수업을 받으러 가겠네요. 새로움은 언제나 낯선 두려움과 설렘이 동시에 찾아옵니다. 새 환경에서의 첫 날은 언제나 가슴을 졸이게 만드네요. 자기소개라도 시키면 정말 수경 안에서 즙을 짜내고 싶을 것 같아요. 재미난 운동 하고 내일 편지에 첫 수업 후기를 적을 수 있다면 몇 자 적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가을엔 더 행복하세요
위로와 사랑을 여기에 두고,
2022년 10월 4일 PM 2:53